우피치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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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두치오(1255~1319) 1989년 전체적인 복원 작업을 끝낸 후 700년 전에 제작될 당시의 찬란함을 되찾은 이 성모화는 처음에는 치마부에의 것으로 알려졌으나 20세기 초에 들어와 새로운 고증작업이 이루어져 두치오의 작품으로 판정이 났다.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 있던 것으로 1948년에 우피치 박물관에 들어왔다. 루첼라이라는 별명은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 있을 당시 같은 이름의 예배실에 걸려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복잡한 구조의 성모가 앉아있는 옥좌, 부드럽고 화려한 성모의 옷에 대한 묘사 그리고 채색의 아름다움 등이 현재 우피치와 파리 루브르 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는 치마부에의 그림 보다 후에 그려진 것임을 일러준다.


작가 : 조토(1267~1337) 비잔틴 성화의 영향을 받은 고딕 양식의 제단화 중 성모자상을 마에스타Maesta라고 하는데, 조토의 마에스타는 두치오와 스승인 치마부에의 제단화에 비해 아직 초보적이긴 하지만 원근법을 적용해 공간의 깊이를 표현하고 있다. 성모 마리아도 선배들이 그린 이전의 그림들보다 훨씬 안정된 모습으로 앉아 있고 천사들의 몸에 대한 표현이나 표정이 훨씬 자연스럽고 인간적이 되어 있다. 특히 그림 하단에 꽃병을 들고 있는 두 천사의 표정을 비롯해 인물들의 표정에서는 영혼의 평화와 성모에 대한 경배의 염이 얼굴 가득 드러나 있어 7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림을 그릴 당시 화가가 간직하고 있던 창조의 희열이 느껴져 온다. 이 작은 차이가 그를 르네상스의 선구자 중 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이 작품 역시 1991년에 완전히 복원되어 제작 당시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피렌체에 있는 오그니산티 수도승들의 성당에 걸려 있었기 때문에 오그니산티 마돈나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들판에서 바위에 그림을 그리다가 때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치마부에의 눈에 띄어 그의 제자로 화가가 된 조토는 중세와 르네상스를 연결하는 중요한 화가이자 화가가 단순한 장인에서 예술가로 대접을 받은 최초의 화가이기도 하다.


작가 : 시모네 마르티니(1284~1348) 1333년에 그려진 시모네 마르티니의 <수태고지>는 14세기에 제작된 시에나 화파의 최대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시에나 대성당에 걸려있던 그림으로 길게 묘사된 몸과 몸을 덮고 있는 옷들의 물결처럼 굽이치는 우아한 곡선들, 인물들이 취하고 있는 다양한 자세들 그리고 정확한 데생과 윤곽선에서 풍겨 나오는 정교함 등은, 아직 르네상스가 오기 위해서는 더 기다려야만 했지만 이전의 13세기에 제작된 작품들과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특히 예수를 잉태하리라는 천사의 예언을 듣고 있는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대한 표현은 기적을 믿지 못하는 두려움과 수줍어하는 여인 같은 모습을 동시에 나타내고 있다.

그림은 이렇게 해서 가브리엘 대천사가 전하는 메시지의 초월성을 형상화하면서도 마리아의 인간적 측면을 동시에 형상화하고 있다. 중앙의 비둘기는 성령을 상징하고 그 밑의 꽃병에 꽂혀있는 백합은 마리아의 순결, 즉 동정을 나타낸다. 정교한 액자는 화가가 금은세공사들을 잘 알고 있었음을 일러준다. 좌우의 경직된 자세로 서있는 두 인물은 그림을 주문해서 기증한 이들로 리포 멤미가 그린 것이다. 중세 성화는 거의 언제나 황금 바탕에 그려졌고 액자도 제단화였기 때문에 성당의 형상을 띠고 있었다.


작가 : 우첼로(1397~1475) 15세기와 16세기를 이탈리아 어로 각각 콰트로첸토Quattrocento, 친퀘첸토Cinquecento라고 한다. 세기를 지칭하는 이 말들은 미술사에서는 르네상스 전기와 성기(盛期)를 뜻하는 미술사 용어가 되어 있다. 콰트로첸토의 대표적 화가 중 한 사람인 우첼로가 그린 <산 로마노 전투>는 흔히 원근법에 미쳐 살았던 화가로 알려진 그의 집념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원래 세 점이었는데, 그 중 하나는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다른 하나는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가 있다. 마치 나무로 만든 목마 같은 말들과 부러진 바닥의 창들이 바둑판처럼 질서 정연하게 흩어져 있는 점 등이 꿈 속에서도 “원근법, 원근법”하며 지냈다는 화가의 집념을 일러준다.

산 로마노 전투는 1432년에 일어난 피렌체와 시에나 간의 전투를 말하는데, 이 전투에서 피렌체가 승리를 거두었다. 우첼로는 전쟁의 잔혹함이나 무모함 등을 고발하거나 증언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그림 전면에 말과 병사들이 들고 있는 장창을 그린 것은 단지 그림 후경으로 넘어가면서 펼쳐지는 전투 장면과의 멀고 가까운 거리 관계를 나타내기 위한 미학적 배려 때문이었다. 특히 그림 후경에 묘사된 풍경은 전투 장면이 아니라 사냥과 포도주 수확 장면들이다. 이들 장면들은 원근법에 몰두했던 화가였지만 우첼로가 아직도 중세의 세밀화 전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일러준다. 하지만 원근법에 몰두한 결과 그의 그림은 그림 전경에 크게 확대되어 묘사되어 그림을 압도하면서 마치 선과 면의 놀라운 기하학적 구성을 보여주는 신선함을 제공하고 있다.

원근법은 르네상스의 산물이다. 자연 만물의 상호 관계가 우연에 의해 지배되는 무질서한 것이 아니라 내적 질서에 의한 질서 정연한 것이고 인간의 지성을 통해 파악 가능하다는 전제 하에 이를 단일한 관점에서 본 사물들의 원근 관계를 통해 표현하는 인식론이자 미학 규범이다. 이는 초월적 세계와 지상 세계의 유사성에 근거한 중세적 세계관을 뒤집는 큰 혁명이었고 나아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가 가능하다는 전혀 다른 인식론의 출발점이 됨으로써 과학적 사고의 근거 역할을 하게 된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원근법은 피렌체 유파의 화가들에서 유래했다. 이들은 고정된 단일한 시점(視點)과 이에 대응하는 하나의 점을 화면 중앙에 설정한 후 이 하나의 점에 집중되는 선상의 사물들의 관계를 탐구하여 화법으로서의 선원근법(線遠近法)을 확립하였다. 아울러 이들은 2차원 평면에 3차원인 현실계를 옮기는 회화에서 명암의 농담과 강약을 통해 사물의 크기와 위치를 표현할 수 있음을 알게 되면서 대기원근법을 개발하게 된다. 원근법은 명암법과 함께 인상주의가 나타날 때까지 고전 회화 규범의 양대 규범으로 수백년간 서구 회화를 지배했다.


작가 :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1410~1492) 우르비노 인근에서 태어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는 피렌체에서 명성을 얻어 이탈리아의 여러 나라 궁정에서 활동을 했다. 늘 지적(知的)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그의 그림들은 실제로 회화에 수학이나 기하학을 적용한 그림들이다. 우르비노 공작 부부를 그린 이 초상화는 인물 묘사에서 드러나는 객관적인 사실주의, 뒷배경의 풍경 묘사 등에서 플랑드르 화풍의 영향을 느낄 수 있다. 움푹 들어간 미간과 볼의 무사마귀는 다른 화가가 그린 초상화에도 자주 등장하는 페데리코 공작의 특징이다. 남편의 초상화는 생전에 그려졌으나 부인의 것은 사망한 후 그려진 것이다. 그래서 부인은 창백한 얼굴빛을 하고 있다. 부인의 목걸이와 남자의 얼굴 묘사 등, 세밀화를 연상시키는 세부 묘사는 플랑드르 회화의 영향을 느끼게 해준다. 그림 뒤에는 각각 부부의 신의와 업적을 기리는 그림이 들어가 있다. 화가는 그림의 배경 역할을 하는 풍경화와 인물들의 초상화를 별도의 연결 장치 없이 서로 잘 조화시키고 있다. 옆모습을 그린 초상화는 당시 기념 메달을 주조할 때 사용되던 흔한 양식이었다.


작가 : 후고 반 데어 구스(1440~1482)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와는 다른 것이었지만, 알프스 너머의 북유럽에서도 회화에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북유럽에서는 얀 반 아이크 등이 유명한 화가였다. 1483년 후고 반 데어 구스의 <포르티나리 제단화>가 피렌체에 도착했을 때 당시 피렌체 화가들은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림은 현재 벨기에의 한 도시인 브뤼헤에 파견나가 있던 금융가문 메디치 가의 토마소 포르티나리가 주문해 제작된 것이다. 인물의 중요성에 비례해 인물의 크기를 인위적으로 조작하고 또 사실적 비례보다는 중세적 상상력에 의거해 원근법을 채택하고 있지만, 당시 피렌체 화가들은 후고 반 데어 구스가 그린 그림의 치밀한 현실 묘사에 혀를 내둘렀다.

그림이 주는 감동의 근원도 세밀한 묘사에서 온다. 가로 길이가 거의 6m에 육박하는 이 거대한 제단화는 메디치 가의 토마소 포르티나리가 주문해 제작된 것인데, 이는 15세기 당시, 피렌체와 벨기에 북부와 네덜란드 일대의 플랑드르 지방의 상업적, 문화적 교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음을 일러준다. 그림 좌우의 패널에는 그림을 주문한 토마소 포르티나리와 그의 아내 그리고 아이들이 섬세한 필치로 그려져 있다.

16세기 플랑드르 회화는 피렌체 회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그림 전경에 있는 꽃병과 짚단 같은 정물화의 놀라운 세부 묘사도 놀라움을 주지만 모든 사람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중앙 패널의 빈 공간과 땅에 누운 아기 예수를 통해 그림을 보는 이들을 기적에 동참시키는 놀라운 구성력도 보여준다. 성탄은 베들레헴과는 다른 풍경 속에 묘사되어 있지만, 주위의 인물들은 모두 성경에 기록된 대로 가난한 목동들과 천사들이고 마구간을 나타내는 말과 소도 보인다.


작가 : 산드로 보티첼리 우피치 박물관의 대표작이자, 전기 르네상스 기인 콰트로첸토, 즉 15세기를 대표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리스 신화에서 가져온 비너스의 탄생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호메로스와 오비디우스, 특히 시인 안젤로 폴리지아노의 시에서 묘사된 대로 비너스가 조개를 타고 키티라 섬에 도착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서풍의 신 제피로스와 미풍의 신 아우라가 바람을 불어 비너스가 탄 조개를 해변으로 밀어 올리자 계절의 여신이 비너스를 맞아들이며 옷을 걸쳐주고 있다. 보티첼리의 또 다른 대작 <프리마베라(봄)>를 주문한 사람이 제작을 의뢰한 것으로 보이지만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이 그림은 겉보기와는 달리 예수의 세례를 묘사한 베로키오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합작 품으로부터 많은 것을 빌려온 작품으로 회화사 최초의 누드화임에도 그림에서 풍겨 나오는 종교적 분위기는 이에서 오는 것이다. 인간의 사랑의 감정에서 절대적 종교 감정을 보았던 신 플라톤 주의적 사고의 영향을 받은 그림이다. 이후의 모든 비너스 탄생은 이 그림을 모델로 삼게 된다. 한 발에 무게 중심을 둔 채 몸을 지그재그로 비틀고 서있는 자세는 콘트라포스토Comtraposto라고 하는 누드 묘사의 한 전형으로 이후 서구 회화에서 서있는 여인 누드는 거의 모두 이 전형을 따라 제작된다.

전설에 의하면 우라노스의 남근이 잘려져 바다에 던져지자 거품이 일어났고 그 거품 속에서 비너스가 태어났다고 한다. 비너스는 그리스 신화에서는 아프로디테라고 하는데, 어원 자체가 거품에서 태어난 여인이라는 뜻이다. 비너스를 받치고 있는 거대한 조개는 이중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중세 이후 조개는 무성생식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 없이 태어난 비너스의 탄생을 나타내며 다른 한편으로는 여인의 음부를 상징하기도 한다.

비너스는 어머니나 아버지 없이 태어나기도 했지만, 처음부터 성숙한 여인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에서 그 상징성을 읽을 수 있다. 비너스는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구원의 여인상인 것이다. 시대마다 모두 당대를 상징하는 비너스를 갖고 있게 마련이다. 때론 요부의 이미지로, 때론 대중스타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20세기 중엽 뉴욕의 지하철 통풍구 위에서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바람을 맞고 있던 마릴린 먼로의 유명한 그림 역시 20세기의 비너스의 탄생이라고 볼 수 있다.


작가 : 산드로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보다 6년 정도 일찍 그려진 <프리마베라> 역시 신화화이다. <비너스의 탄생>과 더불어 두 그림 모두 피에르 프란체스코 디 메디치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제작된 그림으로 추정된다.

그림의 중앙에 비너스가 자리잡고 있고 왼쪽으로는 비너스의 시중을 드는 우미의 삼여신Three Graces이, 오른쪽으로는 꽃의 여신인 플로라가 있다. 그 옆으로는 꽃의 요정 클로리스가 입에 꽃을 물고 달아나자 서풍의 신 제피로스가 뒤쫓고 있다. 그림 가장 왼쪽의 남자는 이성과 지성을 상징하는 헤르메스(로마 신화에서는 메르쿠리우스)인데, 봄이 찾아온 비너스의 동산을 향해 다가오는 먹구름을 제지하고 있다.

<비너스의 탄생>보다 그림이 복잡하고 비유가 상징성을 띠고 있어 다양한 해석을 낳고 있다. 서풍의 신 제피로스와 요정 클로리스가 결합하여 꽃의 신 플로라가 태어나고 있으며 비너스의 머리 위에 있는 큐피드는 눈이 가려진 채 무모한 사랑의 화살을 쏘아 비너스의 시중을 드는 세 여신 중 한 사람을 겨냥하고 있다. 손을 맞잡고 우아한 동작으로 춤을 추고 있는 이 세 여신과 그네들이 걸친 투명하고 가벼운 옷은 당시 궁정에 불던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문학과 자유의 분위기를 일러준다. 이렇게 해서 많은 이들은 맹목적인 사랑에서 우주적 결합을 거쳐 마침내 이성에 이르는 인간 영혼의 단계를 나타낸다고 그림의 의미를 해석하곤 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땅바닥에 흩어진 꽃과 그림의 주문 동기 등을 고려하여 부부간의 애정이 오래가도록 기원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해석을 하기도 한다.

보티첼리는 다양한 문학작품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메디치 가의 로렌초 일 마니피코Lorenzo il Magnifico(‘위대한 로렌초’라는 뜻, 1449~1492)의 궁에서 당시 널리 읽혀졌던 루크레티우스, 오비디우스, 호라티우스 등의 시인들의 작품이 많은 영향을 주었음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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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베로키오)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이 그림은 레오나르도가 스승인 조각가 베로키오의 아틀리에에서 그림을 배우면서 스승과 함께 그린 그림이다. 특히 배경의 풍경화는 제자였던 레오나르도의 솜씨를 잘 보여준다. 또 그림 전면 왼쪽의 금발의 천사도 레오나르도가 그린 것이다. 그림 중앙에 서있는 마르고 경직된 몸을 보여주는 예수와 세례 요한이 스승인 베로키오의 솜씨인데, 조각가인 베로키오의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화가 열전>의 작가 바사리에 의하면 스승인 베로키오는 젊은 제자 레오나르도의 재능에 절망해 “다시는 붓을 들지 않겠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그림에서 예수의 얼굴이 서툴게 그려진 것을 알 수 있는데, 제삼자의 개입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최근에 엑스레이 촬영을 한 결과 이러한 바사리의 기록이 거의 사실임이 드러났다. 그림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멀리 보이는 풍경 역시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렸다고 추정된다.


작가 :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 피렌체 인근의 한 수도원에 있던 그림이다. 스승 베로키오 밑에 있을 당시인 1472년부터 시작된 이 그림은 20살밖에 안 된 청년이 이토록 놀라운 그림을 그릴 수 있었겠느냐고 생각되어 옛날에는 레오나르도의 것으로 간주되질 않았었다. 하지만 레오나르도의 스승이며 조각가였던 베로키오의 영향은 성서를 받치고 있는 화려하게 조각된 받침대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가브리엘 천사는 프로필만 그려졌지만, 성모는 거의 앞을 향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오른쪽 끝에는 침대가 보이는 침실이 있고, 인물은 단 두 명이지만, 얼굴 표정, 옷의 주름, 천사의 날개, 그리고 무엇보다 배경의 멋진 풍경 등 그림의 디테일은 하늘의 뜻을 전하는 성스러운 순간의 위엄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당시로서는 유례가 없는 전혀 새로운 것들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것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아무데도 없다. 단지 그림의 각 부분에서 드러나는 스타일들을 분석한 결과 다 빈치의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검게 묘사된 삼나무들, 꽃밭과 가꾸어진 나무 등은 모두 이탈리아 토스카나를 연상시킨다. 게다가 그림 중앙의 멀리 자리잡고 있는 안개 속의 풍경은 의심할 여지없는 레오나르도의 것이다.


작가 :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 피렌체 인근의 한 수도원에 있던 그림이다. 스승 베로키오 밑에 있을 당시인 1472년부터 시작된 이 그림은 20살밖에 안 된 청년이 이토록 놀라운 그림을 그릴 수 있었겠느냐고 생각되어 옛날에는 레오나르도의 것으로 간주되질 않았었다. 하지만 레오나르도의 스승이며 조각가였던 베로키오의 영향은 성서를 받치고 있는 화려하게 조각된 받침대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가브리엘 천사는 프로필만 그려졌지만, 성모는 거의 앞을 향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오른쪽 끝에는 침대가 보이는 침실이 있고, 인물은 단 두 명이지만, 얼굴 표정, 옷의 주름, 천사의 날개, 그리고 무엇보다 배경의 멋진 풍경 등 그림의 디테일은 하늘의 뜻을 전하는 성스러운 순간의 위엄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당시로서는 유례가 없는 전혀 새로운 것들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것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아무데도 없다. 단지 그림의 각 부분에서 드러나는 스타일들을 분석한 결과 다 빈치의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검게 묘사된 삼나무들, 꽃밭과 가꾸어진 나무 등은 모두 이탈리아 토스카나를 연상시킨다. 게다가 그림 중앙의 멀리 자리잡고 있는 안개 속의 풍경은 의심할 여지없는 레오나르도의 것이다.


작가 : 페루지노(1445~1523) 묘사된 인물들의 자세와 얼굴 표정에서 우러나오는 고요함과 단순함의 분위기가 이 그림을 명작으로 만들어주고 있다. 아 그림 역시 최근에 복원되어 제작 당시 그림이 지니고 있던 찬란함을 회복해 보는 이들을 더욱 감동시키고 있다.

정확하게 삼등분된 구도, 가상의 건축물 뒤로 빛이 퍼져나가는 개방감을 통한 영성의 표현, 그리고 무엇보다 세례 요한과 순교자 성 세바스티아누스가 기둥처럼 성 모자를 보호하고 있는 건축물과 순교자들의 상징적 일체감 등이 이 페루지노의 그림을 걸작으로 만들어 주고 있다.

세례 요한이 저 정도의 나이였다면 당시 예수의 나이 역시 성모의 무릎에 앉아있을 어린 나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그림은 대부분의 성화가 그렇듯이 지상의 시간 개념을 완전히 부정하며 로마 시대의 장군으로 화살을 맞아 순교한 성 세바스티아누스를 어린 예수 곁에 배치했다. 그러므로 이 성화의 모든 것은 현실을 넘어서는 다른 세계에 있는 것들이다.


작가 :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  원래 이 그림은 여러 개의 패널로 구성된 제단화의 일부였다. 1504년 자신만이 아니라 많은예술가들을 후원해 주었고 개종을 하지는 않았지만 루터를 보호하기도 했던 프리드리히 현공(賢公, 1463~1525)을 위해 그려진 그림이었다.

이 그림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감명을 받은 독일 최고의 화가인 뒤러가 이탈리아 미술에 바치는 찬사이다. 그림을 잘 보면 그림의 뒤에 묘사된 기병들의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동명의 미완성 그림을 연상시키고 있고 또한 로마의 폐허를 묘사한 부분에서는 만테냐를 연상시키고 있는데, 이 모든 창조적인 모방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대가들에 대한 뒤러의 존경을 나타낸다. 이미 이 그림을 그릴 당시 뒤러는 베네치아를 다녀온 후였고 그 영향은 그림에 나타난 화려하고 밝은 채색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뒤러의 그림에는 그만의 특징이 역시 잘 나타나 있는데, 데생에 능했던 그의 세밀한 묘사와 특히 금은세공사였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장신구와 보석에 대한 화려한 묘사 실력 등이 그것이다. 그림 정가운데 얼굴을 돌린 채 가장 화려한 장신구들을 몸에 걸치고 있는 동방박사는 화가 뒤러 자신이다. 뒤러는 자신의 자화상을 많이 그린 화가였고 대담하게도 예수와 자신을 동일시하기도 했다. 이 그림에서도 자신을 동방박사와 동일시하고 있다.


작가 : 조반니 벨리니(1432~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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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미켈란젤로(1475~1564) 흔히 “톤도 도니”라 불리는 이 작품에서 톤도는 둥근 메달을 뜻하고 도니는 그림을 주문한 사람의 이름이다. 1504년 아뇰로 도니와 막델레나 스토로치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한 선물로 제작된 그림이다. 이들 부부의 그림은 라파엘로도 그린 적이 있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 두 사람의 결혼이 아니라 두 사람 사이에서 첫 아이가 탄생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그려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그림은 미켈란젤로가 그린 유화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그림이다. 뿐만 아니라 원래의 둥근 액자 그대로 보존되어 있기도 해서 더욱 귀중하고 나아가 우피치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 중 가장 귀한 미술품 중 하나다. 인물들은 신비한 분위기를 띠기보다는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고 있고 특히 조각을 연상시킨다. 강렬한 색과 몸을 심하게 틀고 있는 인물들은 인위적인 스타일을 추구하는 후일의 매너리즘을 예고하고 있다.

전통적인 성 가족화의 일반적인 구도나 인물 묘사와는 전혀 다른 대담함을 보여주고 있는데, 특히 그림 중앙에서 몸을 뒤틀어 아기 예수를 등에 올려놓은 채 고개를 틀고 있는 성모의 자세는 근육의 움직임을 통해 내면적 상태를 표현하는 미켈란젤로가 조각에서 자주 사용했던 기법을 연상시킨다. 실제로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치 부조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드는데, 이것은 미켈란젤로 자신의 주장이기도 했다. 그는 “회화는 부조에 가까이 갈수록 완벽함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연상시키는 이러한 인간 몸에 대한 묘사는 붓의 터치를 완전히 감춘 채 같은 계열의 색조에 명암을 주어 양감을 얻는 묘사법 덕택에 얻어진다. 그렇게 해서 인물들의 몸의 움직임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있으며 자연주의의 세부 묘사 없이도 현실에 생동감을 부여하고 있다. 성 가족 뒤의 배경에 등장하는 나신의 인물들은 미켈란젤로가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벨베데레의 아폴론>이나 1506년에 발견된 <라오콘> 군상의 인물 묘사에 대해 연구를 했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이것만 보아도 이 작품의 제작년도를 1506년 이후로 추정할 수 있다.

어쨌든 이 그림을 확대해서 보면 모든 미학적 설명을 떠나 동정녀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친밀한 애정이 표정과 근육의 움직임을 통해,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 얽혀있는 몸의 지체들을 통해 누구에게나 쉽게 느껴져 온다.


작가 : 라파엘로(1483~1520) 온화한 색조의 배경 풍경은 그림에 신비감을 더해 준다. 성모와 아기 예수 그리고 아기 세례 요한은 안정감 있는 피라미드 구도를 따라 배치되어 있다. 피렌체에서 라파엘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아기 예수는 성모의 무릎을 빠져 나가면서 세례 요한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있다. 그러면서 요한이 내미는 새를 쓰다듬고 있다. 방울새는 수난을 상징한다. 완벽한 조화를 보여주면서도 예수의 수난을 예고하는 슬픔이 그림 속에 가득하다.


작가 : 티치아노(1488~1576) 16세기 베네치아 파 화가 중 가장 위대한 화가인 티치아노는 왕과 고관대작들을 위해 그림을 그린 유명인사이기도 했다. 그의 그림은 이탈리아를 벗어나 전 유럽에서 주문이 쇄도할 정도였다. 흔히 예술사에서는 티치아노를 데생을 중시하는 대가들과 맞선 색의 대가로 본다. 이 작품은 우르비노 공작의 아들인 귀도발도 델라 로베레의 주문을 받아 그려진 그림이기 때문에 흔히 <우르비노의 비너스>라고 불린다. 애교와 요염함이 풍겨 나오는 여인이 아무런 수치심도 없이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현재 드레스덴 박물관에 있는 조르지오네의 그림에서 포즈를 따왔지만, 티치아노의 비너스에 대한 해석은 완전히 다르다. 바다나 전원을 배경을 한 이전의 그림들과는 달리 티치아노는 비너스를 규방에 위치시키고 있다. 뒤에는 두 명의 하녀들까지 등장하고 있다. 특히 여인의 손이 음부에 가 있는 자세는 여인이 고급 창녀가 아닌가 하는 의혹마저 들게 한다. 하지만 충성심을 상징하는 강아지는 이 그림이 결혼한 부인을 그린 것임을 일러주면서 그림의 전체적인 의미도 결혼생활의 신의를 묘사한 것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잠이 든 강아지만이 아니라 손에 들고 있는 장미꽃, 창문에 놓여있는 도금양 등이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해 준다.


작가 : 틴토레토(1518~1594) 우피치 박물관에는 레다와 백조의 이야기를 다룬 크기는 다르지만 유사한 두 점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레다의 하녀가 등장하는 그림이 큰 그림으로 19세기에 우피치에 들어온 작품인데, 작품의 구도와 붓의 터치와 색감 등을 통해 어렵지 않게 틴토레토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16세기 베네치아 파의 유력한 화가 중 한 사람이었던 틴토레토는 같은 파의 화가였던 티치아노나 베로네세와는 다른 화풍을 갖고 있었다. 두 대가들로부터 값비싼 주문을 빼앗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기도 했던 틴토레토는 그래서인지 독창적인 포즈와 구성을 보여주려고 애를 썼다.

1555년에 그린 그림을 다시 그린 큰 그림은 레다와 그녀의 하녀를 상반된 자세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두 인물의 시선은 서로 교차하고 있으며 그 시선 속에는 에로틱한 함의가 담겨 있다. 제우스가 백조로 변해 레다와 통정을 하는 신화를 묘사하고 있는 이 그림에서 하녀는 오리를 가두는 망태를 가지고 와 백조를 내쫓으려고 하고 있다. 발치의 강아지 역시 불륜을 고발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레다의 손은 백조를 만지고 있고 몸은 기울었다.


작가 : 카라바조(1570~1610)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든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이든 카라바조는 이들 신적 세계를 묘사할 때 언제나 현실에서 관찰할 수 있는 생동감 있는 인물과 장면들을 사용했다. 이로 인해 그림을 주문한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때론 주문이 취소되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카라바조의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인 이 <바쿠스>도 사춘기에 있는 한 소년의 모습을 통해 술과 취기의 신인 바쿠스를 묘사하고 있는 파격을 보여주고 있다. 카라바조는 동성애자였고 이 그림에서 앳된 모습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청년의 얼굴과 몸짓 그리고 왼손으로 들고 있는 술잔 등은 얼마든지 에로틱한 의미를 간직한 상징으로 읽을 수 있다. 인물의 모델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일었지만 현재는 카라바조 자신의 자화상이라는 설이 가장 설득력 있는 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놀라운 사실적 묘사, 자연스러움을 넘어서서 사물들에게 미학적 생명을 부여하여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니게 만드는 빛과 음영의 묘미 등은 카라바조의 그림을 대할 때마다 그림을 보는 이들로 하여금 묘사된 사물 그 이상의 다른 무엇을 느끼도록 한다. 화가는 늘 그랬듯이 로마의 길거리에서 모델을 구했을 것이다. 청년의 오른팔을 받치고 있는 이불자락은 결코 보기 좋게 정돈된 상태도 아니고 깨끗하지도 않다. 화가는 그림의 배경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마도 가난한 자신의 화실을 그대로 노출시킨 것이리라. 아무것도 이상화시키지 않았지만, 그러나 그림 전면의 기가 막힌 정물화는 카라바조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림에서 청년이 어딘지 여성스러운 분위기를 띤다면 이는 화가가 동성애적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화가의 나이는 20대 중반의 어린 나이였다. 고아로 자라며 온갖 고생을 했고 성격이 과격해 싸움과 온갖 스캔들을 일으키며 급기야 살인까지 저질러 만년에는 도망을 다니다 객사를 하고 만 카라바조의 그림은 서구 미술사에서 르네상스와 바로크를 이어주는 중요한 갈림길에 위치한다. 흔히 서구 미술사에서 명암법chiaroscuro으로 불리는 기법의 창시자로 이후의 회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작가 : 카라바조(1570~1610) 16세기 말 로마에서 화단에 등단한 카라바조는 유럽 회화사에서 가장 혁신적인 화가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화가로서 짧은 생을 살았지만, 그의 그림은 이탈리아를 벗어나 전 유럽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작품은 영국 화가가 소장하고 있다가 1917년에 우피치 박물관에 기증한 작품이다.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성서의 내용을 그린 <이삭의 희생>에서도 카라바조는 성상적 도상학에 의존하지 않고 사실적 묘사로 일관하고 있다. 뒷배경을 이루는 베네토 지방의 풍경은 뒤로 물러나 그림에서 거의 중요성을 갖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강한 빛을 받아 강조되고 있는 것은 그림 전면에 등장하는 세 인물들의 표정이다. 깊게 주름진 아브라함의 얼굴, 비명을 지르며 아비의 손에 목이 졸려 있는 이삭의 표정, 그리고 두 부자 사이에 위치해 있는 날카로운 칼과 그 칼을 쥐고 있는 억센 아브라함의 손아귀 등이 사실적인 터치로 묘사되어 있다. 오른쪽의 양은 이삭 대신 번제의 제물로 쓰일 동물이다.


작가 : 안니발레 카라치(1560~1609) 사선으로 가로지르며 그림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비너스의 황홀한 뒷모습은 어색하게 뒤틀려 있는 자세로 인해 그림을 보는 이들에게 모종의 움직임을 상상하도록 한다. 예를 들면 누워있던 여신이 갑자기 일어났을 수도 있다. 그림의 에로틱한 의미는 사랑의 여신인 비너스의 다리를 끌어안은 채 혀로 입술을 축이고 있는 큐피드의 모습에서 쉽게 읽을 수 있다. 화가는 단순히 여인의 몸을 그린 것만이 아니라 붓으로 여인의 몸에 고혹적인 색을 입히면서 여인을 사랑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후일 카라치는 이러한 에로틱하면서도 삶의 풍요로움을 찬양하는 그의 스타일로 인해 로마의 귀족들로부터 초청을 받아 많은 저택에 프레스코 벽화를 그렸다. 그의 그림에서 티치아노와 틴토레토 등의 베네치아 유파의 화려한 색을 대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당시 이들 화가들의 뒤를 이은 매너리즘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작가 : 클로드 로랭(1600~1682) 클로드 로랭은 평생을 풍경화만 그렸던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인 프랑스 17세기 화가다. 해가 뜨는 항구의 풍경은 특히 그가 즐겨 그린 소재였다. 사실적인 묘사가 아니라 그는 언제나 박명의 아침에 빛과 어둠 속에 잠겨있는 환상적인 풍경을 그렸다. 그리고 비록 작게 그려진 탓에 확인하기 쉽지 않지만 등장하는 인물들도 역시 고대 신화나 성서 혹은 기타 다른 전설에서 가져왔다.

하지만 이러한 고전주의 특유의 화법이나 스타일에도 불구하고 그를 인상주의의 가장 먼 선구자로 지목하는 것은 그의 그림에 최초로 태양이 직접 등장하기 때문이다. 대개의 경우 태양은 직접 묘사되는 대상이 아니라 간접적으로만 묘사될 뿐이다. 그것은 인상주의 이전의 화가들은 절대로 야외에 나가 그림을 그리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풍경화를 포함해 모든 그림은 화실에서 상상을 통해 그려졌을 뿐이다. 그럼에도 클로드 로랭의 그림에는 마치 화가가 야외에 직접 나가 그림 것 같은 빛의 찬란함이 존재한다. 바닷가에 그림에 묘사된 것 같은 육중한 건물들이 있을 리 없다. 또한 저렇게 큰 범선이 육지 가까이 정박할 수도 없다. 모든 객관적 사실을 무시한 채 화가는 떠오르는 태양이 사물을 비추는 아침 한 순간의 인상을 포착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그는 인상주의의 한 선구자임에 틀림없고, 이 그림 <메디치 빌라가 있는 항구>는 클로드 모네의 작품으로 미술사 최대의 혁명을 일으킨 인상주의라는 말을 낳은 <떠오르는 태양, 인상>(1873)을 떠올리게 한다. 약 250년의 세월을 건너 뛰어 클로드라는 같은 이름을 갖고 있던 두 화가가 떠오르는 태양과 바다를 그리면서 만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