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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링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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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A


Roma

로마 1000 배 즐기기


2000

천주교광주대교구

1. 로마의 역사

로마는 약 2,700년 전에 건설되었다. 건설 이래 로마는 처음에는 로마제국의 중심부로, 나중에는 카톨릭교회의 중심지로 세계 도처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 때문에 유럽에서 쓰이는 언어 중 상당수가 라틴어에 그 기초를 두고 있으며, 여러 나라의 정치, 법률제도 역시 고대 로마의 것을 모델로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의 건축물 역시 고대 로마의 건축 기술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로마는 BC 8세기 중엽 철기시대의 오두막마을로 시작되었다. 역사가 리비(Livy)의 학설에 따르면, BC 753년에 로물루스(Romulus)1)가 로마를 세웠다. BC 616년에는 로마의 이웃인 에트루리아인(Etruscan)이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정치적 횡포가 극심해지자 봉기가 일어났으며, 결국 에트루리아 인은 쫓겨나고 509년에 로마 공화정이 서게 된다.

2년마다 선출되는 집정관이 나라를 다스렸으나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전제집정관을 임명하였다. BC 494년에는 귀족으로부터 평민들이 불이익을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호민관 제도가 생겼다. 그러나 BC 27년에 황제가 전권을 쥐게 되자 로마의 민주주의는 막을 내렸다. BC 44에 한동안 독재자로 군림하였던 율리우스 카이사르(Iulius Caesar)가 암살당하고 그 이후 17년에 걸친 내전이 계속되었다.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Octavianus)가 로마의 첫 황제가 됨으로써 내전은 끝나게 된다. 옥타비아누스는 후에 아우구스투스라 불리었다. 아우구스투스가 군림하던 때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셨다. 그 후 로마제국은 급속도로 성장을 하였고 급기야 3세기 말에 디오클레씨아누스(Diocletianus)황제는 네 명의 황제가 로마제국을 분할하여 다스릴 것을 결정하였다. 흑자무역과 더불어 거대한 통치지역으로부터 거두어들이는 세금 덕택에 로마는 세계에서 가장 번성하는 도시가 되었다.

독일의 오도아케르(Odoacer)가 476년에 로마제국을 멸망시킬 때까지, 로마는 약 1,200년 간 250명의 통치자가 다스렸다.

2. 떼르미니 주변

1) Piazza dei Cinquecento

1887년 이디오피아 침략 전쟁에서 전사한 500인의 병사들을 기념한 역전 광장이다. 시내 관광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버스 터미널로도 이용된다.

2) Terme di Diocleziano

로마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306년에 만든 고대 로마의 최대 목욕탕으로 한번에 3000명 이상이 목욕을 할 수 있는 규모였다고 한다. 현재는 로마 국립 박물관과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이 서 있어 옛날의 거대한 목욕탕 흔적은 찾기가 힘들다.

3) Santa Maria degli Angeli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성당으로 교회 내부에는 르네상스 시대의 명화와 조각품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이탈리아 통일 이후에는 국가 유공자들을 매장하거나 전몰 영령들의 기념식등이 열리기도 한다.

4) Piazza della Repubblica(공화국광장)

이탈리아 통일 직후인 1870년에 조성된 원형 광장. 일명 에세드라 광장이라고도 한다. 그 이유는 디오클레시안의 욕장 일부인 에세드라(exedra : 반원형 닛치)의 모양을 따랐기 때문이다. 남서쪽에 있는 아케이드 건물은 북이탈리아 토리노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졌다. 광장 중앙에는 1885년에 세워진 분수가 있다. 4명의 벌거벗은 님프상은 각기 다른 형태의 물을 상징하는 수중 동물에 기대고 있다. 해마가 바다를, 물뱀이 강을, 백조가 호수를, 그리고 정교한 도마뱀이 지하수를 상징한다. 중앙에 있는 상인 바다의 신 클라우쿠스(Glaucus)는 자연의 힘에 승리하는 인간을 표현하고 있다.

5) Galleria Nazionale D´arte Antica(국립미술관)

바르베리니 광장의 남쪽에 바르베리니 궁전의 2층에 있다. 1633년에 완성된 바르베리니 가의 사저를 미술관으로 만든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이다.

바로크의 거장 베르니니에 의해 설계된 입구와 ‘라이온 계단’ 등 호화롭게 장식된 계단과 현관이 특징이며 주로 13-16세기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명화들을 전시하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필리포 리피의 ‘성모와 어린 그리스도’, 라파엘로의 ‘Fornarina’ 등이 있다. 기원전 5세기의 루도비시 옥좌, 아우구스투스 황제상, 악어와 하마가 그려진 모자이크화, 서관, 초상 컬렉션,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의 회반죽 장식과 벽화 등이 볼만하다.

6) Santa Maria Maggiore(성모 마리아 대성당)

325년 8월 4일 교황 리베리우스 꿈에 나타난 성모 마리아가 눈이 내리는 곳에 성당을 건축하라고 계시했는데, 한 여름에 실제로 눈이 내렸다고 한다. 실제로 기초를 세운 때는 431년이다.

미켈란젤로가 만든 성당과 로마네스크 양식의 종루가 볼만하며, 내부의 장식으로는 고대 로마 신전에서 가져온 36개의 대리석주와 콜럼부스가 신대륙에서 가져온 금을 사용한 천장화가 흥미롭다. 성당의 내부는 보르게제 소성당과 성체 소성당으로 나누어진다.

① 성 구유 경당 : 중앙 제대 아래에 위치한 이 경당에는 베들레헴의 말구유의 나무조각이 보관되어 있다. 어떤 경로로, 누가 옮겨 왔는가에 대해서는 확실한 자료가 없으나, 몇 백년 이상 내려오면서 이 구유에 대한 전설은 사실로 굳어져 버렸다. 이를 증명이나 하듯 바로 이 경당 앞에 무릎꿇고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는 비오 9세(1846-1878)의 석상이 세워져 있다. 이 교황은 역사상 교황좌에 가장 오래 계셨던 분이다. 그 옆에는 왕성한 정력과 창작욕으로 명성을 날린 1600년대 바로크 예술의 거장 베르니니의 묘소가 있다.

② 압시대(abside) : 압시대의 모자이크는 1292년 야코포 토리티라는 모자이크 대가가 제작했으며, 현재까지 그대로 보전되어 있다. 구세주와 성모님이 같은 반열에 놓여 있고, 그 오른쪽에는 세례자 요한, 사도 성 안토니오, 그리고 콜론나 추기경의 모습이 있다. 왼쪽에는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 성 프란치스코, 그리고 이 모자이크를 제작하게 한 니콜라오 교황이 아주 작은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③ 성체 소성당 : 중앙에 네 명의 천사가 감실을 떠받들고 있는데, 이는 천사들에게 공경받고 계신 성모님을 나타낸다.

콜러네이드가 서 있는 3중 회중석은 5세기에 지어진 원래 건축물의 일부이다. 코스마테스크의 대리석 바닥과 로마네스크 양식 종탑, 그리고 푸른 자기의 장식 원반은 중세의 양식이다. 새롭게 판 장식된 천장은 르네상스 양식이며, 교회의 이중 돔과 그것의 인상적인 앞뒷면은 바로크 양식이다. 산타 마리아 마죠레의 가장 큰 특징은 모자이크이다. 이미 5세기부터 본당 회중석에 성서 장면의 그림이 있었으며, 개선문은 모자이크로 장식되었다. 중세 작품의 하이라이트는 로지아에 안치된 그리스도이다.

7) San Pietro in Vincoli(쇠사슬 성당)

베드로가 예루살렘과 로마의 옥에 갇혔을 때 묶였던 쇠사슬이 성당의 주 제단 밑에 간수되어 있다. 5세기에 세워졌으며, 1475년에 개축되었다. 이 쇠사슬은 처음에는 각기 다른 감옥에 있던 두 개의 사슬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인 헬레나가 이를 보관하기 위해 두 개의 쇠사슬을 한데 모으자 두 쇠사슬이 하나로 결합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쇠사슬은 현재 성당 내부의 중앙계단 밑에 보관되어 있다. 남쪽 회랑에 있는 율리우스 2세의 묘소에는 미켈란젤로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2.35m 크기의 모세상이 웅장한 자태를 과시하고 있다.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가 70대에 완성한 것으로 매우 성스러우면서 생동감이 느껴질 만큼 정교해 보는 이들의 탄성을 자아낸다. 기록에 의하면 미켈란젤로는 이 작품을 완성한 후 모세상의 신비로움에 스스로 빠져들고는 탄성을 지르며 ‘왜 말을 안 해’라며 자기도 모르게 모세상의 무릎을 내리쳤다고 한다. 진짜로 살아 있는 것처럼 긴장감이 가득 차 있는 자세와 활활 타는 듯한 눈빛, 당당하게 놓인 손, 옷 사이로 불쑥 나온 단단한 무릎 등 그 장엄한 모습에는 기와 힘이 느껴진다. 머리에 난 뿔은 어떤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힘을 나타내는 고대의 상징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성서의 히브리어를 잘못 해석한 탓(뿔이 아닌 광채가 머리에서 나왔다고 한다)이라고 한다.

3. 스페인 광장 주변

1) Piazza di Spagna(스페인 광장)

스페인 광장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17세기 때 바티칸 주재 스페인 대사관이 있었기 때문. 137계단은 18세기 프랑스 대사의 기부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당시 이 지역은 로마 교통의 중심지로 외국인들을 위한 호텔과 상점들이 즐비해 있었다. 콘도티 오른쪽 다음 길 86번지에 있는 그레코 까페는 18세기부터 영업을 해온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됐다는 까페로 전형적인 로마의 성격을 지닌 곳이다. 스탕달, 발자크, 리스트, 바그너 등 유명한 예술가들이 즐겨 찾았다고 한다. 당시의 의자, 테이블 등이 남아 있으며 벽에는 유명한 문인과 예술가들의 초상화들로 장식되어 있다.

계단의 오른쪽에는 키츠와 셀리의 기념관도 있다. 바이런 등의 자필 원고도 전시된다.

광장의 중앙에는 건축가 베르니니의 부친이 바로크 양식으로 만든 ‘조각배 분수’가 있다. 옛날 테베레 강둑이 무너졌을 때 여기까지 조각배가 흘러왔다는 에피소드에서 유래된다.

계단 위에 있는 트리니타 디 몬티 교회는 1495년 프랑스의 샤를르 8세에 의해서 건축계획이 추진되었다. 16세기에 완성된 교회는 프랑스 혁명으로 파괴되었다가 19세기에 재건되었다.

2) Piazza del Popolo(포폴로 광장)

스페인광장으로부터 골동품 상점들이 늘어서 있는 바뷔노 거리를 따라가다 핀치오 언덕과 테베레 강 사이에 있는 포폴로 광장은 1820년 핀초 언덕을 조성한 주세페 바리디에가 완성했다. 광장은 핀초 언덕과의 조화를 생각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언덕에서 바라보는 전경이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이집트에서 가져온 기원전 13세기의 유물 오벨리스크가 중앙에 우뚝 솟아 있다. 높이 24m(토대를 포함하면 36m)나 되는데 1589년까지는 치르코 막시모 경기장에 있었으나 당시 교황 식스투스 5세의 도시 계획 정책에 따라 현재의 장소로 옮겨졌다.

고대 로마를 이탈리아의 아드리아 해안과 연결하기 위해 BC 200년에 건립된 플라미니아 거리는 포폴로 문을 통해 시가지와 연결되었다. 이 문은 교황 비오 4세 메디치가 16세기에 건설한 거대한 문이다. 건축가 난니디 바치오 비조(Nanni di Baccio Bigio)가 개선문을 본 따 설계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조각을 아치의 양옆에 위치시켰고, 거대한 메디치 가문의 문장이 위에 있다. 1세기 후에는 알렉산데르 7세가 스웨덴의 여왕 크리스틴느의 로마 방문을 기념하여 베르니니에게 내부를 장식하도록 했다.

광장의 남쪽 길 양쪽으로 일명 ‘쌍둥이 성당’이라고 불리는 산타 마리아 디 미라콜리와 산타 마리아 디 몬테 산토가 있다. 이 성당은 17세기 후반에 건축되었는데, 마르틴 루터가 첫미사를 올렸으며, 갈릴레이가 구금을 당한 적도 있다. 건축가 카를로 라이날디는 이 두 교회로써 자신이 동시대인인 베르니니와 보로미니만큼 독창적이었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는 이 광장에 포인트를 주기 위해 두 교회를 대칭이 되게 하려고 했다. 그런데 오벨리스크에서 보기에 왼쪽이 오른쪽보다 좁았다. 그래서 그는 산타 마리아 데이 키라콜리(오른쪽)는 둥근 돔으로 초라하고 보다 좁은 왼쪽 자리의 산타 마리아 인 몬테산토는 타원형 돔으로 함으로써 교묘하게 해결하는 한편, 광장과 접하는 지지드럼을 같은 크기로 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했다.

그런데 잘 정돈된 이 광장의 합리주의적인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여기에서 거행되었던 많은 일들은 야만적이었다. 18·19세기에는 카니발을 축하하기 위하여 공개처형이 이 광장에서 종종 이루어졌다. 유죄선고를 받은 사람은 성당 건물에 여러 번 부딪혀서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이후에 보다 과학적인 처형방법의 하나로 단두대가 도입되었으며, 이 방법의 마지막 처형은 1826년에 이루어졌다.

포폴로 광장에서 코르소 거리로 내려가는 기수없는 경마도 잔인한 것이었다. 말들을 못이 박힌 밧줄로 감고, 말 바로 뒤에서 화약을 터트려서 말들이 빨리 달리게 자극한 경기였기 때문이다.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교회는 로마 예술 작품의 가장 큰 저장소라고 할 수 있다. 이 성당은 1472년에 교황 식스투스 4세가 세웠다. 안드레아 브레뇨와 핀투리키오 등이 이 작업에 참여했고, 후에는 프바만테와 베르니니 등이 참여해 후속물들이 만들어 졌다. 델라 로베레 경당(Della Rovere Chapel)에는 핀투리키오의 프레스코가 있고, 체라시 경당(Cerasi Chapel)에는 카라바조의 두 개의 명작, ‘성 베드로의 십자가 상’(Crucifixion of St Peter - 성인의 십자가를 거꾸로 돌리려는 노력을 강조하기 위해 극적인 원근법이 사용되었다) 과 ‘성 바오로의 개종’(Conversion of St Paul)이 있다. 이곳에 있는 스테이드 글라스는 1509년 프랑스 화가 기욤 드 마르실라가 제작한 것이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것은 라파엘이 그의 후원자인 아고스티노 키지(Agostino Chigi)를 위해 디자인한 키지 경당이다. 키지 경당 제단의 양옆 닛치에는 베르니니와 로렌체토가 만든 조각상이 놓여 있다. 돔에 있는 모자이크는 ‘일곱 성체의 창조주 하느님’을 보여주고 있다. 또 죽은 자에 대해 그린 바닥 모자이크(무릎 꿇은 해골)는 17세기에 이 경당에 첨가되었다.

성당 제단에는 포폴로의 성모 마리아로 알려진 13세기의 그림이 있다.

네로의 유령(Nero´s Ghost)

로마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네로는 오랫동안 사람들이 기억 속에 살아있었다. 중세 동안에는 네로의 뼛가루가 묻힌 장소에서 자라는 호두나무에 네로가 나타난다는 말까지 있었다. 그 나무에 둥지를 튼 까마귀들은 그가 저지른 무시무시한 범죄에 대해 그를 벌주고 있는 악마들이라고 생각되어졌다. 1099년 교황 파스칼 2세가 그 자리에 처음 교회를 세울 때 그 나무는 잘렸는데 아마도 그 지역 사람들을 떨게 했던 미신을 없애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3) 핀치오 정원(Pincio Gardens)

핀치오 정원은 언덕 언저리의 포폴로 광장 위에 자리잡고 있는데, 너무나 교묘하게 자리잡고 있는데다가 많은 나무가 심어져 있어서 아래에서 보면 정원까지 지그재그로 난 길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우산소나무, 종려나무, 그리고 참나무가 늘어선 이 정원의 넓은 가로수 길은 멋진 산책로로 손꼽힌다. 금세기에만 해도 간디, 무솔리니, 리차드 슈트라우스, 그리고 이집트의 왕 파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들이 이곳의 카페이자 레스토랑인 카시나 발라디에르(Casina Valadier)의 손님이었다. 이 정원까지는 빌라 보르게제에서 올라가거나 트니니타 데이 몬티 거리를 따라 올라가는 것이 좋다. 이곳은 여행객들이 가장 많이 산책하는 해질녘에 특히 아름답다. 오롤로지오 거리에 있는 물시계는 한 도미니크 수사가 설계했는데 1889년 파리 박람회에 전시되기도 했다.

4) 보르게제 박물관

볼만한 작품  : 잠자는 에르마프로디테,

플루토와 페르세포네 : 베르니니의 걸작으로 플루토가 그의 신부를 채어가는 장면을 그렸다. 이 조각가의 놀라운 대리석 조각 솜씨가 손가락 표현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아폴로와 다프네 : 베르니니의 걸작 중 하나다. 다프네 요정이 나무로 변하기 직전 태양의 신 아폴로로부터 도망치는 장면을 묘사했다.

다비드 : 베르니니의 25세 때 작품이다. 다윗이 골리앗을 향해 돌을 던지기 직전의 모습을 묘사했다. 다비드의 얼굴은 자신의 얼굴을 모델로 하여 표현했다.

4. 베네토 거리 주변

1) Chiesa Immacolata Concezione

일명 해골사원이라고도 한다. 지하실에 약 4,000명의 성직자들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다. 1642년에 세웠다. 지하에 1528년에서 1870년 사이에 죽은 수도사 약 천 명의 뼈를 모아 만든 뼈의 인테리아 데코레이션이 있다.

5. 퀴리날레 언덕 주변

로마의 일곱 언덕 중 하나인 퀴리날레 언덕은 제정 시대 동안에는 대부분 주거 지역이었다. 16세기에 이르러서는 가장 촉망받는 곳이 되었다. 그중 중요한 것은 교황이 차지하여 퀴리날레 궁전(Palazzo del Quirinale)이 되었다. 지금은 이탈리아 대통령의 관저이다. 콜론나와 알도 브란디시 같은 유명한 가문들은 언덕 아래쪽에 그들의 궁전을 가지고 있었다.

1) Fontana di Trevi

로마의 가장 아름다운 명소로 꼽히는 트레비 분수. 트레비는 ‘삼거리’를 뜻한다. 교황 클레멘스가 모집한 분수 설계공모전에 니콜로 살비(Nicolo Salvi)의 작품이 선정되어 1732년에 착공되었고 건축가의 사망과 재정난 등으로 30년 후인 1762년에 완공되었다.

가로 20m, 높이 26m의 폴리 궁전의 벽면은 이 분수의 아름다운 배경이 되고 있다. 한가운데에 大洋의 신 Oceanus가 있고 양옆의 석상은 풍요와 건강을 상징한다. 바다의 신 넵튠이 트리톤이 조종한 두 마리의 말(격동의 바다와 잔잔한 바다 즉 바다의 대립되는 두 이미지를 상징)을 타고 달려가는 모습은 박력이 넘친다. 분수대의 거대한 수반은 대양을 상징한다. 벽면 위에는 모라 병정을 인도하는 처녀와 수로 공사를 계획하는 아그리빠가 부조로 묘사되어있다. 이 분수의 물은 19세기 아우구스투스 때 축조된 비르고(Virgo) 수로를 통해 지금도 공급되고 있다. 어린 소녀가 물이 솟아나는 샘을 가리키는 부조가 있는데, 바로 이 소녀의 이름을 따서 수로의 이름이 붙여졌다.

이 샘을 뒤로하여 동전을 던지는 관습이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불분명하다. 한번 던져 분수 안으로 들어가면 로마에 다시 올 수 있다는 의미이며, 두 번을 던져 들어가면 원하는 사랑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세 번째 시도는 하지 말자. 왜냐하면 성공하면 그 사람과 이혼한다는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 동전들은 정기적으로 회수되어 자선사업에 쓰인다.

2) Santa Maria in Trivio(산타 마리아 인 트리비오)

이탈리아 건축물들을 흔히 퍼사드의 건축물이라고 한다. 이렇게 명명하게 된 이유를 1570년대의 건축물인 산타 마리아 인 트리비오의 퍼사드에서 가장 잘 알 수 있다. 가짜 창문에 주목해 보자. 그 안에는 착시용 그림까지 있다. 특히 안토니의 게라르디(Antonio Gherardi 1644-1702)의 천장 프레스코 New Testament 이 유명하다. 실내장식은 화려한 바로크 양식으로 되어 있다.

3) Santi Vincenzo e Anastasio

트레비 분수를 내려다보는 로마에서 가장 높은 바로크 퍼사드 중의 하나이다. 기둥들은 추기경 라이몬도 마차리노(Raimondo Mazzarino)의 커다란 갑옷 모양으로 장식되었는데, 바로 그가 1650년에 이 교회의 건립을 마르티노 롱기 2세(Martino Longhi II)에게 위탁하였다. 문 위의 여인 반신상은 추기경의 조카딸이자 루이 14세의 첫사랑이었던 마리아 만치니(Maria Mancini)이거나 그녀의 여동생 오르텐시아(Ortensia)일 것이다. 벽 뒤에 심장의 일부를 안치시킨 교황들을 기록해 놓은 기념 바닥 장식이 있다. 심장의 일부를 안치시키는 무시무시한 전통은 16세기 말 교황 식스투스 5세가 시작하였는데, 금세기 초에 이르러 교황 비오 10세가 금지시켰다.

4) Sant´Andrea al Quirinale

아름다운 장미빛 대리석 실내 장식 때문에 바로크의 진주로 알려진 이 성당은 1658년부터 1670년 사이에 베르니니가 설계하였고, 그의 조수들이 완공하였다. 이것은 예수회를 위해 지어졌고, 그래서 많은 IHS 문양이 있다. 교회를 지으려고 했을 때, 장소는 넓지만 깊이가 얇았다. 그래서 베르니니는 타원형으로 해 놓은 설계 중 긴축의 포인트를 제단 쪽이 아닌 양 옆으로 향하도록 하는 혁신적인 방법을 택했다. 그래서 시선이 제단 끝으로 돌도록 이끌었더. 그리고 그는 여기에 다양한 예술 작품들을 만들도록 했는데, 그 작품들은 각기 독립적이지 않고 서로 연관되어 있다. 올터피스인 십자가에 못박힌 성 안드레아 상은 스터코로 되어 있는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으며 스터코로 된 성 안드레아는 다시 채광창과 성령 쪽을 올려다보고 있다. 성 스타니슬라스 코스트카의 방들은 놓치지 말아야 한다. 1568년에 19세로 죽은 이 예수회 신입생의 방은 17세기 예수회의 화려한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6. 베네치아 광장 주변

1) Monumento Vittorio Emanuele II

이탈리아가 통일된 것은 1870년이었다. 1911년 당시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초대 국왕 빅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를 기념하여 세운 기념당이다. 일명 ‘조국의 계단’으로 불린다. 중앙에 있는 기마상이 빅토리오 엠마누엘 2세이며, 그 뒤편에 제 1차 세계대전 당시의 무명 용사들의 무덤이 있다. 그 밑에서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거나 두 사람의 병사가 직립부동의 자세로 이 무명 전사의 묘를 지키고 있다.  계단 양쪽에 있는 분수는 오른쪽이 타레니아 해, 왼쪽이 아드리아 해를 나타낸다. 건물 윗 부분의 큰 동상은 오른쪽이 ‘조국애와 승리’, 왼쪽이 ‘사색과 행동’을 나타낸다.

2) Palazzo Venezia(베네치아 궁전)

베네치아 광장의 왼쪽에 궁전이 있다. 1564년부터 230년간 베네치아 공화국 대사관으로 사용되었다. 1797년 오스트리아 점령 하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곳은 로마 교황의 거처로 사용되기도 했다. 1916년에는 국가 소유가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뭇솔리니는 이곳 2층의 발코니에서 군중들을 향해 2차 대전 참전 선포를 비롯하여 많은 연설을 했다. 현재는 이탈리아 각지의 공예품을 모아놓은 박물관과 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표적인 전시물은 13세기에 만들어진 에나멜로 장식된 천사상이다.

3) 트라야누스 황제의 기념원주

113년 트라야누스 황제가 만든 원주 꼭대기에는 원래 트라야누스 황제의 상이 있었는데, 16세기에 교황 식스투스 5세가 베드로의 청동상으로 바꿔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원주 안에는 위로 올라 갈 수 있는 나선형의 185계단이 있다.

이 원주는 다치아족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기둥의 높이는 약 40m로 포룸이 세워진 퀴리날레 언덕의 높이와 거의 같다. 나선형으로 솟아있는 기둥에는 로마인들의 전쟁준비 모습에서부터 다치안 족이 추방되어 전쟁이 끝나는 모습까지 약 2천 5백여 명에 달하는 인물들과 전투장면이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4) Santa Maria d´Aracoeli (천국의 계단의 성모 마리아 성당)

이 성당은 고대 주노(Juno) 신전 자리에 서 있다. 이곳의 기둥 22개는 여러 곳의 고대 건축물에서 가져온 것이다. 예를 들면 왼쪽의 세 번째 기둥은 거기 새겨진 조각으로 그것이 황제의 침실인 ‘쿠비쿨로 아우구스토룸’(Cubiculo Augustorum)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로마 원로원과 시민의 교회였던 산타 마리아 인 아라코엘리는 많은 승리를 기념하는 장소였다. 바다를 주제로 하여 그려진 천장은 1571년 레판토 전투를 기념하는 것으로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의 지시로 만들어졌다. 교황의 본콤파니(Boncomapgni) 가문의 문양인 용을 제단의 끝부분에서 볼 수 있다.

기적을 행하는 아기 예수 상 : 나무로 만들어졌고 높이가 20.5인치, 그리고 높이 4인치짜리 왕관을 쓰고 있다. 이 입상에는 금 사슬과 핀, 그리고 사람들이 감사의 표시로 바친 보석으로 장식된 옷이 입혀져 있다.

역사 : 15세기 당시 예루살렘에 있던 프란치스코 수사 한 명이 어린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본떠 나무 조각상을 만들었다. 그 나무는 겟세마니 동산의 올리브나무였다고 한다. 그 수사는 조각을 끝내고 색을 입힐 때가 왔으나 필요한 색소가 없었다. 그가 잠든 사이 한 천사가 나타나 색을 칠했다고 한다. 이 소문이 나자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로마에서는 그 수사를 소환했다. 항해 도중 폭풍우를 만나 아기상이 바다에 빠졌으나 놀랍게도 아기상을 담고 있던 상자가 그 배가 도착했던 리보르노 항구에 떠밀려 들어왔다. 그 후 예수상의 명성은 더욱 널리 퍼져 나갔고, 사람들은 그 조각상에 경배드리고자 떼를 지어 몰려들었다. 그리고 실제로 죽음을 앞둔 중환자들 앞에 아기상을 갖다 놓으면 환자가 기적적으로 회복되기도 했었다. 마침내 1897년 5월 2일 교황 레오 13세가 장엄한 의식을 베풀어 아기상에 왕관을 씌웠다. 신자들은 주로 아기상 앞으로 편지를 보내는 방법을 사용한다.

프레스코화법으로 그려진 장례식 그림은 핀투리키오(Pinturicchio)의 작품으로 교회의 퍼사드 벽돌 뒤에 숨겨져 있던 보물 중의 하나다.

4) Foro Romano(포로 로마노)

포로 로마노에 대한 설명과 구경하는 방법은 다음 페이지 참조.

6) 캄피톨리오 언덕

캄피톨리오 언덕은 로마의 일곱 언덕 중에서 가장 존엄한 언덕으로 옛부터 종교와 정치의 중심지였다. 최고 신 주피터의 신전을 비롯하여 이 언덕에 25개의 신전이 있었다고 한다.

1536년 황제 샤를 5세가 로마를 방문하게 되었을 당시 이곳은 진흙투성이었다. 그래서 교황 바오로 3세는 미켈란젤로에게 광장의 샛길과 콘세르바토리 궁전 및 세나토리오 궁전의 재건축 계획을 세우도록 하였다. 광장의 보도블록은 선명한 기하학 모양을 그려 세 방향을 둘러싼 르네상스 건축과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공간을 창출하고 있다. 왼쪽에는 캄피톨리오 박물관, 오른쪽에는 콘셀바토리 궁전 미술관(Palazzo del Conservatori - 아드리안 사원에서 가져온 아름다운 부조들이 안뜰에 전시되어 있다)이 있다. 정면에는 로마 시청이 있다. 이곳은 12세기경부터 로마 원로원으로 사용되어 왔고, 지금은 로마 시장의 사무실로 쓰이고 있다.  바로크 양식의 정면에는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한 아름다운 계단이 건물 양옆에서 2층 입구까지 이어진다. 광장 한 복판에 있는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기마상이 서있는 대리석 받침대도 역시 미켈란젤로 작품이다.

이 시청의 뒤로 나가면 고대 로마의 유적들이 모여있는 포로 로마노가 눈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타르페이아라는 큰 바위가 있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반역자들 이 바위에서 아래 낭떠러지로 떨어뜨려 처형했다고 한다. 황금에 눈이 멀어 로마를 배반하고 적에게 문을 열어주었던 타르페이아가 그 적장에 의해 이 낭떠러지에 떨어진 것이 시초라고 한다.

이 유적의 남쪽에 완만하게 펼쳐진 언덕이 팔라티노(Palatino)이다. 늑대에게 자란 로몰로와 레모 이야기인 로마건국 전설의 발상지이다.

7) Colosseo(콜로세움)

로마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콜로세움은 고대 로마의 유적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원형 경기장이다.

두께 12m, 최대 지름 188m, 최소 지름 156m, 둘레 527m, 높이 57m의 4층으로 된 타원형의 건물인데, 1층은 도리아 식, 2층은 이오니아 식, 3층은 코린트 식의 아치가 장식되어 있다. 내부는 최대 지름 78m, 최소 지름 46m의 타원형 그라운드가 있고 5만 명의 관람객들이 쉽게 들어갈 수 있도록 80개의 아치형 문을 만드는 등 매우 실용적으로 디자인되어 있다. 칸칸마다 나누어진 맹수들의 우리 위에 나무로 바닥을 만들어 지상과 지하를 분리시켰다.

72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명령으로 짓기 시작하여 80년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 때 완성되었다.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경기장인데, 콜로세움이란 이름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거대하다’는 뜻을 가진 Colossale에서, 또 하나는 경기장 옆에 네로 황제가 세운 높이 30m의 거대한 금도금 상 콜로소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이다. 전자의 설이 유력하다. 이곳에서 처참하고 잔혹한 게임이 벌어지곤 했는데, 검투사들은 생명을 걸고 맹수와 싸웠으며,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사자밥이 되기도 했다. 심지어는 장내에 물을 채워 전투를 하는 모의해전 등도 벌어졌다.

또한 햇살이 너무 따가울 때면 천장에 직물로 만든 돔 형식의 창(Velarium)을 설치해 햇살을 차단했다고 한다. 이 베라리움은 건물 위층의 기둥에 고정되어 밧줄모양으로 꼬여 원형극장의 바깥쪽 계선주에 묶여 있었다고 한다.

건물 완공된 이래 300년간 피비린내 나는 사투가 계속 벌어지다가 405년 호노리우스 황제가 격투기를 폐지함에 따라 마침내 처참한 역사도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건물 곳곳에는 수많은 구멍이 있는데 이것은 건물과 대리석을 연결하는 연결고리 구멍으로 당시 건물 전체를 대리석으로 치장했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선문은 콜로세움의 서쪽에 있다. 파리의 개선문의 원조가 된 문이다. 315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로마 북쪽의 테베레 강에 놓인 미르비오 다리에서 막센시우스를 격파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세웠다. 세 개의 아치로 이루어져 있는데 앞면에는 트라야누스 황제, 하드리아누스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승전을 기념한 부조가 새겨져 있다.

8) Bocca della Verità(진실의 입)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교회의 입구 왼쪽에 있다. 진실의 입은 강의 신 홀르비오의 얼굴을 조각한 것으로 진실의 입에 손을 집어넣으면, 거짓말을 한 사람은 즉시 물어뜯는다는 민간신앙이 있다. 원래는 고대 로마 시대의 하수구 뚜껑이었다.

교회 안쪽에는 기원후 5세기 경의 모자이크가 있다.

9) Circus Maximus(대전차경주장)

시저 때 짓기 시작하여 네로 황제 때까지 지었다는 이 마차 경주장은 길이가 370m, 폭이 80m에 달했다. 그리고 경기장 둘레에는 약 30만명을 수용하는 관중석이 있다. 영화 벤허에 나오는 유명한 마차 경기 모습은 이젠 볼 수 없고 경기장 흔적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이곳에서 많은 그리스도교인들이 순교하기도 했다. 남쪽으로 펼쳐지는 아벤띠노 언덕에 날이 저물면 조명을 밝혀서 고대 로마의 낭만을 느낄 수 있게 한다.

10) San Giovanni in Laterano(라테란 대성당)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원래 제우스 신을 믿었으나 전쟁에서 연전연패하던 중 크리스챤이었던 어머니가 ‘군복을 입지 말고 알몸으로 나가 싸우면 이길 것이다’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하자 이를 믿고 테베레 강 유역의 다링에서 격전을 벌여 승리하게 되자 개종하게 된다. 당시 적군들은 무거운 갑옷을 입고 있어서 한번 강으로 떨어지면 대부분 익사를 한 반면 로마군들은 다시 헤엄쳐 나와 계속 전투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그리스도교를 공인하게 되었고, 그 당시 대제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파우스타와 어머니 성녀 헬레나가 살던 궁전을 로마 교황 멜키아데스에게 기증하였다. 교황은 즉시 이 궁전의 일부를 성당으로 개조하였으며, 이 성당은 세상에서의 첫 번째 공식적인 교회가 되었으며 가장 오래된 성당이라고도 할 수 있다. 4세기 중엽까지 확장 공사가 계속되었고, 교황 대 그레고리오는 이 성당을 세례자 요한과 사도 요한에게 다시 봉헌하여, 이 때부터 ‘라떼란의 성 요한 성당’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1307년 교황이 프랑스 아비뇽에 유폐를 당할 때까지 거의 천 여년 동안 역대 교황의 주거지로 교황청의 역할을 하였다.

성녀 가타리나의 노력으로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1377년 1월 17일 로마에 다시 돌아오면서 그동안 교황의 부재로 많은 손상을 입었던 이곳에 더 이상 머무르지 않고 바티칸으로 교황청을 옮기게 되었다. 이 대성당은 현재까지도 로마의 주교좌 성당이며, 로마 교구의 교구청이 이 안에 있다.

① 대성당의 입구 : 현재의 건물은 1649년에 완성된 바로크 양식으로, 입구 왼쪽에 있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상(17세기 초에 퀴리날레 궁에서 옮겨온 것)과 성당 정면의 꼭대기에 알렉산드로 갈릴레이가 조각한 높이 6m의 석상 15개가 있다. 이 석상들 중 가운데에는 그리스도상이 놓여 있으며 14인의 교부상들이 위치해 있다.

② 성문(Porta Santa) : 1300년 보니파시오 8세 때 교회 사상 처음으로 발표된 희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문이다.

③ 중앙 정문 : 원래 고대 로마 광장에 있는 원로원에 있던 문이었는데 1661년 교황 알렉산드로 7세에 의해 이곳에 옮겨졌다. 기원전 1세기에 주조된 청동문으로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문이기도 하다.

④ 코르시니의 소성당

원래 사도 야고보의 제대가 있던 곳이다. 그리스식 십자가 형태로 그 내부를 장식한 다양한 색깔의 대리석과 금속, 그리고 돔의 내부 석고 장식 등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로마에서 보기 드문 아름다운 소성당이다.

⑤ 중앙 제대 : 제대 위에 있는 대형 감실 안에는 금으로 도금된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의 청동상이 있다. 이 동상 안에는 두 사도의 머리 부분 유골이 모셔져 있다고 한다.

⑥ 성체의 제대 : 중앙 제대 오른쪽 회랑 끝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 제대는 14세기 때의 것인데, 이 제대 좌우의 네 개의 청동 기둥은 1세기 때 예루살렘의 대성전에서 로마인들이 가져 온 것을 다시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제대 위의 대형 액자 안에는 사도 베드로 때부터 314년 교황 성 실베스테로 때까지 사용했다고 전해오는 나무로 된 제대의 일부분이 들어있다.

⑦ 높낮이가 다른 3 중 구조로 되어 있는 천장은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것을 상징한다. 이에 발맞춰 바닥 모자이크 역시 계단의 형상을 띠고 있다. 천장 그림은 미켈란젤로 제자들이 그렸다고 한다.

11) Santa Scala(성 계단 성당)

예수께서 빌라도 총독으로부터 수난을 받을 당시에 있었던 28개의 계단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성녀가 예루살렘에서 옮겨왔다고 한다. 현대 각 계단 층층이 나무판자로 씌워져 있는데 이 위를 무릎을 꿇은 채 기도를 하며 기어가는 고행자들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12) Santa Croce in Gerusalemme(성 십자가 성당)

성녀 헬레나는 예루살렘의 성지를 복원하면서 예수님과 관계된 성물들을 수집하여 로마로 가져왔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예수님께서 지셨던 성 십자가와 오른쪽 강도의 십자가였다. 골고타 산 위에서 예수님의 죄명판을 발견한 성녀는 어느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였는지 가릴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문둥병을 앓고 있던 한 여자가 십자가에 손을 대고 병을 낫게 해 달라는 기도를 바쳤는데, 모든 사람 앞에서 병이 깨끗하게 낫는 기적이 일어났다. 헬레나 성녀는 이 십자가를 삼 등분하여, 하나는 당시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아들에게 보내고,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의 주교에게 맡겼으며, 마지막 남은 부분은 로마로 가져왔다. 그 무렵 이곳에는 세소리아 왕조에서 지어 놓았던 궁전이 세워져 있었는데, 성녀는 그 궁전을 개조하여 성당으로 만들었고, 그 때부터 ‘예루살렘의 성 십자가 성당’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① 성당 종탑 : 1144년 교황 루치오 2세 때에 세워졌다. 모두 8층으로 나누어져 있는 이 종탑은 순전히 벽돌만 사용해서 만들었으며, 종탑의 각 층 경계는 흰 대리석을 넣어 구별할 수 있도록 했다. 종탑의 꼭대기에는 세 개의 종이 달려 있는데, 첫 번째 종은 예수님께, 두 번째 종은 성모님과 베르나르도 성인에게, 세 번째 종은 사도 베드로에게 봉헌되었다.

② 성당 내부 : 중앙 통로 위의 천장은 모두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 위에 성녀 헬레나와 콘스탄티누스 대제 등이 석고로 부조되어 있다.

③ 성녀 헬레나의 소 성당 : 이 소성당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어머니를 위해 지은 것으로 바닥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발견한 자리와 무덤 동굴 안에서 가져온 흙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④ 거룩한 유물들의 소성당 : 예수님께서 매달리셨던 십자가의 나무조각들과 예수님께서 쓰셨던 가시관의 일부인 가시 두 개와 사도 토마의 손가락뼈가 보관되어 있고, 커다란 장대못은 십자가에 예수님을 달 때 박았던 세 개의 못 중 하나라고 한다. 또한 죄명판과 작은 돌 조각이 세 개 있는데, 이는 베들레헴의 마구간과 예수님이 묶여 채찍질 당하셨던 그 돌기둥, 그리고 무덤 동굴에서 가져온 돌 조각이다.

7. 트라스테베레 주변

1) Santa Cecilia in Trastevere(트라스테베레의 성 세실리아 성당)

산타 체칠리아는 3세기에 순교한 성녀로 음악의 주보성녀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이 교회는 4세기 경 그녀의 집이었던 자리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제단 아래에는 1599년 스테파노 마데르노가 제작한 산타 체칠리아 상이 있다. 이밖에도 12세기에 세운 종루와 13세기 로마파의 거장 피에트로 카발리니가 그린 ‘최후의 심판’이 입구의 벽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벽화는 매주 일요일 오후, 화·목 10:00-11:30 에만 공개된다.

지하실에는 지금도 산타 체칠리아의 석관이 있다.

2) Santa Maria in Trastevere(트라스테베레의 성 마리아 성당)

기원전 38년에는 이곳에서 하루 종일 기름이 솟는 기적이 일어나 그리스도의 세계 정복의 은총을 의미했다고 한다. 3세기 경에 건설이 시작되어 12세기에 완성되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로 정면의 원주를 끼워넣은 아치와 종루 등이 중세의 분위기를 전해준다. 내부 뒤쪽의 모자이크는 13세기 카발리니의 작품이다. 본당에 있는 22개의 기둥은 로대 로마 건물에서 가져와 지었다.

퍼사드 모자이크는 성모 마리아가 예수님께 젖을 먹이는 장면을 나타낸다. 주위에 램프를 든 열 명의 여인들이 서 있다. 불이 켜진 8개의 램프는 처녀임을 상징하고, 불이 꺼진 램프를 들고 있는 2명의 여인은 과부를 상징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앱스 모자이크(제단 뒷편 둥근 천정 모자이크)는 동정녀 마리아의 대관식을 나타낸다. 그 오른쪽에는 동정녀 마리아의 일생을 그린 6개의 모자이크가 있다.

3) Gianicolo(쟈니꼴로 언덕)

해발 88m의 남북으로 길게 늘어진 언덕.

오른쪽의 가리발디 언덕길을 오르면 성 베드로가 십자가 형에 처해진 장소로 추정되는 곳에 세워진 산 피에트로 인 몬토리오 교회(황금 언덕 위의 성 베드로 성당)가 있고, 그 뒤쪽 성당에는 베드로가 거꾸로 매달렸던 십자가가 있다. 이 교회 앞에 있는 작은 광장에서 바라보는 로마 거리도 멋있다. 녹음짙은 산책길에는 가리발디와 함께 이탈리아 통일 운동을 위해 싸우다 죽은 애국자 흉상이 옆으로 줄지어 서 있다. 대포도 하나 있는데 매일 정오에 발사 장면을 보여준다.

아니타 가리발디 기념상 : 가리발디의 아내 아니타의 유해가 이 기념상 밑에 안치되어 있다.

8. 나보나 광장 주변

1) Piazza Navona(나보나 광장)

86년에 도미씨아누스 황제가 조성한 길이 240m, 폭 65m의 전차 경기장의 유적지다. 중세에는 이 광장의 한 쪽에 물을 채우고 물놀이나 보트놀이를 했다고 한다.

광장에는 3개의 분수가 주위의 건물과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는데, 광장 남쪽의 것이 안토니오 마리의 작품인 무어인의 분수, 북쪽에는 바다의 신인 넵튠이 문어와 싸우고 있는 넵튠의 분수, 중앙에 있는 것이 강의 분수다. 특히 강의 분수Fontana dei Fiumi는 베르니니가 만든 것으로 바로크 조각의 걸작으로 꼽힌다. 오벨리스크 아래에 다이내믹한 4명의 남성 상이 있는데, 이는 아프리카의 나일강, 아시아의 갠지즈강, 유럽의 도나우(다뉴브) 강, 아메리카의 라플라타 강을 의인화한 것이다. 이는 세계의 4대 강이 로마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Pax Romana를 구가하던 강력한 로마제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사상을 표현한 것이다.

이 분수에는 재미있는 야화가 있다. 4대강의 분수 앞에는 베르니니의 라이벌인 보로미니가 설계한 성 아녜스 성당의 정면이 있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베르니니는 자기의 라이벌인 보로미니가 지은 성 아녜스 성당이 무너질 것 같아 아메리카의 라플라타 강 상징 대리석상이 놀라서 손으로 받치려 하는 모습으로 조각하고, 나일강 상징의 대리석상은 아예 안보려고 보자기를 뒤집어 쓴 모습으로 조각했다고 전한다. 이에 보로미니는 성당 앞에 손을 가슴에 얹고 있는 아녜스 상을 조각해 걱정 말라는 뜻으로 응수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야화가 신빙성이 없는 것은 4대강의 분수가 성 아녜스 성당보다 15년 전에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아녜스 성당은 창녀의 집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자리는 304년에 젊은 성녀 아녜스가 그녀의 신앙을 포기시키려는 세력에 의해 발가벗겨진 채 묶여 있던 곳이다. 지하실에 있는 대리석 부조는 그녀의 머리가 기적같이 자라나 그녀의 정숙함을 보호하기 위해 벗겨진 몸을 덮고 있다. 그녀는 이 자리에서 순교했고 노멘타나 거리에 있는 그녀의 이름을 가진 지하묘지에 묻혀있다.

2) Piazza Farnese

캄포 데이 피오리(꽃의 광장이라는 뜻)에서 남서쪽으로 5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파르네세 궁전은  로마에서 가장 아름다운 르네상스 양식의 궁전 중의 하나이다.

1515년부터 50년 동안 공사하여 만들어졌는데, 이 공사에 미켈란젤로도 참여했다. 궁전 정면 현관 위의 문장이 붙은 거대한 창이 그의 작품이다. 1-3층의 창은 각각 도리아 식, 이오니아 식, 코린트 식의 원주가 장식하고 있다. 현재 프랑스 대사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3) Pantheon(판테온)

B.C 27년 올림푸스의 모든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사위인 아그리파가 만들었다. pan은 모든 것, Theon은 신이라는 뜻. 미켈란젤로가 천사의 설계라고 극찬할 정도로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철근을 사용하지 않고 콘크리트만이 사용되었고 돔의 지름은 43.3m, 미켈란젤로가 베드로 성당의 돔을 만들 때 이것을 많이 참조하였고 또한 일부러 이 돔의 지름보다 작게 만들었다고 한다. 80년에 벼락이 떨어져 큰 불이 난 뒤 128년에 개수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기둥이 모두 16개다. 이 건물의 직경과 높이는 한결같이 43.3m 그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에 견줄만한 데가 없을 정도다.

돔의 중량을 줄이기 위해 내부를 속이 빈 우물반자식으로 만들었다. 또한 벽 사이에 끼워 넣어진 벽돌 아치가 내부의 버팀벽 역할을 하면서 돔의 무게를 분산시켰다. 뚫린 돔 아래 중앙홀에서는 계속 회오리가 일어나고 있다. 이 회오리를 이용하여 노래하면 홀 전체를 울리는 소리가 사람의 소리가 아닌 천사의 소리로 들린다.

그리고 빅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 움베르토 1세, 라파엘로 등의 묘지가 지금도 남아 있다. 특히 라파엘로 묘소 위에는 그가 직접 디자인한 ‘삿소 성모상’이 있다.

4) Santa Maria Sopra Minerva

로마 시내에 몇 개 없는 고딕식 교회 가운데 하나. 교회 앞 광장에는 고대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를 등에 태운 코끼리가 서 있다. 고대 로마의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의 신전 위에 세워져 있어 미네르바 교회라 불리게 되었다. 이곳에는 15세기의 종교화와 조각 작품이 많다. 필리포 리피의 프레스코 화를 비롯해서 프라 안젤리코의 묘, 미켈란젤로가 시작한 그리스도 상 등이 미술적 가치를 더하고 있다. 중앙 제단의 대리석 관에는 성녀 카타리나의 유체가 잠들어 있다. 그 왼쪽에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한 그리스도 상이 있다. 이 상은 미켈란젤로의 제자들이 완성했다.

9. 아피아 거리 주변

1) Catacombe di San Callisto(성 갈리스도 카타콤베)

로마에는 약 60여개에 이르는 카타콤베가 있는데 땅굴의 총 연장 길이는 약 9백 Km 정도이며 3백여년 동안 이곳에 묻힌 시신은 약 6백만 정도라고 한다. 로마법에 의하면 묘지는 성역으로 함부로 침범할 수 없다는 점을 이용하여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갈리스도 카타콤베는 가장 오래된 곳으로 지하 5층 깊이에 길이가 20km가 넘는데, 약 10만 여명이 묻혀 있다. 이곳은 특이한 암석층으로 되어 있어 손이나 간단한 도구로 파기가 쉽지만, 곧바로 표면이 딱딱하게 굳어 무너질 염려가 없다고 한다. 또한 공기를 스스로 정화하는 작용이 있어서 거대한 지하도시를 만드는 데 큰 지장이 없다고 한다.

안에 있는 지하제단은 ‘작은 바티칸’격인 장소로 3세기 아홉 분의 교황께서 묻혔던 곳이다. 그 옆에는 시저와 폼페이우스와 함께 제1차 삼두 정치를 하던 마르쿠스 크라수스의 부인이며 음악의 주보 성녀인 ‘세실리아’가 묻혔던 곳으로 지금은 성녀 세실리아의 대리석 조각이 놓여 있다. 이는 1599년 성녀의 관을 열었을 때 목격한 당시 모습 그대로를 조각한 마데르노의 작품이다.

2) Domine Quo Vadis

64년 로마에서 커다란 화재가 발생하여 시내가 불바다가 되었다. 네로 황제는 그리스도교도들에게 그 죄를 뒤집어씌우고 엄청난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다. 그 때 베드로는 박해를 피해서 로마 시내를 빠져나갔다. 그가 아피아 거리를 달리고 있을 때 그리스도가 나타났다. 그는 물었다. “도미네 쿠오 바디스 -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리스도가 대답했다. “다시 한번 십자가에 못박히러 로마에 가노라.” 성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말을 듣고 수치심으로 얼굴을 들지 못했다. 발길을 돌려 로마로 돌아와 순교했다. 그 전설의 장소에 세워진 교회가 바로 도미네 쿠오 바디스 교회이다.

3) Terme di Caracalla(카라칼라 목욕탕)

콜로세움에서 남쪽으로 약 1km 떨어진 곳에 있는 로마의 공중 목욕탕이다. 이 목욕탕은 로마 제국 후기의 방탕한 황제 카라칼라가 217년에 만들었는데 떼르미니 역 근처의 디오클레시아노 목욕탕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최대의 크기를 자랑했다.

한번에 16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1937년부터는 7월 초부터 8월 말까지 두 달간 이곳에서 야외 오페라 무대가 개설된다.

로마 대제국이 목욕탕으로부터 망하기 시작했다는 건 알려진 사실. 이 욕장도 일조를 한 곳이다. 로마제국 상수도관은 납을 되어있기 때문에 로마인들 대부분은 무기력과 정신장애에 시달렸다. 로마인들이 말기에 성도덕이 문란해진 것도 납중독 때문이었다.

10. 바티칸 성당 주변

1) 바티칸 시(Città del Vaticano)

1870년 9월 20일에 빅토리아 엠마누엘 2세가 이탈리아의 통일을 위해서 교황국의 영토를 합병하였다. 그리고 1926년에는 무솔리니가 정권을 잡자마자 교황청과의 관계정상화를 시도하여 마침내 1929년 2월 11일에 라테라노 조약을 체결하였다. 바티칸은 교황청과 이탈리아 사이에 조인된 라테라노 조약의 결과 설립된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국가이다. 라테라노 조약은 바티칸 시에 대한 교황청의 배타적 관할권을 규정하고 카스텔 간돌포 궁을 포함하여 몇 개 건물(우르바노 대학, 산타 마리아 마죠레 성당, 라테란 성당 등)에 대한 완전한 소유권을 인정하고 있다. 바티칸의 면적은 44 헥타르 즉 110에이커(0.5 km2) 정도다. 그중 26 헥타르는 건물이 들어서 있고 18헥타르는 도로와 정원이다. 419명의 시민과 365명의 거주민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탈리아와 합병 전 교황국 영토는 4만 km2 였다.

2) 성 베드로 성당(S. Pietro)2)

바위 위에 세워진 이 성당은 로마로 온 사도 베드로의 무덤이다. 콘스탄틴 대제 통치 시기에 그 자리에 작은 기념비(2.7 X 1.75)가 세워졌다. 후에 수세기에 걸쳐 제단이 지어졌고, 덮개는 제단을 높이기 위해, 돔은 영화로움을 나타내려고, 성당은 로마 성직자와 신자들의 미사나 순례자들을 위해 건축되었다.

이전 건물(4세기)보다 훨씬 큰 현재의 모습은 1452년에 시작된 니콜라스 5세(1447년에 교황이 된 그는 로마를 교황권의 중심 도시로 만들기로 결심했다.)의 재건 명령 이후, 1506년 교황 율리우스 2세 때 브라만테에 의해 착공되었다. 고전문화의 부흥을 외친 르네상스는 미켈란젤로, 브라만테, 라파엘, 첼리니 등과 같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어 새롭게 탄생한 로마에 교회 및 궁전을 건축하게 하였다. 120년에 걸쳐 작업해 1626년 11월 28일 교황 우르바누스 8세  때 완성되었다. 수용인원만도 6만 명이 넘고, 50개의 제단과 500개의 기둥, 베르니니, 미켈란젤로 등이 제작한 450개의 조각상 등이 들어서 있다. 규모 면에서 세계 제일을 자랑하는데 총면적 1만 5160m2에 돔의 직경만도 42m나 된다. 안 길이는 186 m.

성 베드로 성당은 도나토 브라만테가 설계하고, 미켈란젤로가 공사를 지휘하였다. 약 백년에 지난 후에야 원 설계가 바뀌고, 돔 하단 3열의 거대한 구조물에 옆 통로가 더해졌다.

미켈란젤로 건축에 추가된 큰 본당과 두 개의 더 작은 측면 통로는 교황 바오로 5세의 의뢰로 카를로 마데르노가 1607년에서 1612년 사이에 건립하였다. 이러한 확장 공사는 브라만테가 기획한 조화로운 모습을 무너뜨렸고, 그것의 간접적인 결과로 돔에 비해 너무 큰 정문을 건설하게 되었다. 1626년 결국 완성을 보게 된다.  

3) 베드로 광장

베르니니는 1656년부터 1667년까지 성 베드로 광장을 설계하고 건축했다. 회랑과 열주를 덧붙임으로써 베드로 성당은 보다 가늘고 긴 모습을 더하게 되었다. 열주는 4줄씩인데 안 기둥이 바깥 기둥보다 작아서 서로 정확히 같은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원주형 기둥이 284개, 사각으로 된 기둥이 각각 네 줄로 88개가 세워져 있으며, 어느 한 지점에 서서 보면 4개의 기둥이 겹쳐져 한 개의 기둥으로 보인다. 회랑 바닥에서 천정까지는 그 높이가 16미터나 된다. 그리고 그 위에 140개 대리석상 (주로 그 당시까지의 성인, 그리고 교황들의 모습으로 구성되어 있고, 석상 하나의 높이는 3. 24미터임)이 세워져 있다. 모두 베르니니의 제자들과 조수들이 만든 것이다.

이렇듯 거대한 회랑을 광장 양옆에 나란히 세운 까닭은, 대성당은 그리스도의 몸, 앙쪽 회랑은 그리스도의 양 팔을 상징한다. 이는 양 팔을 벌리고 이곳에 오는 모든 이들을 종교나 종족, 언어, 관습 등을 초월하여 하느님의 집에 초대한다는 그리스도의 참 모습을 보여 주고 싶은 베르니니의 깊은 신앙심에서 발로되었다고 한다.

총 142개인 이 열주는 양 끝에 두 개의 현관 주랑이 연결되어 있다. 이 주랑은 사다리꼴 모양으로 되어 있어 성당에서 보면 실제보다 광장이 가깝게 보인다. 그리고 광장 입구에 전체 복합 건축물의 중앙 포커스를 둠으로써 눈에 보일 정도로 정문 크기를 줄여서 정면의 시각적 충격을 줄이고, 돔을 전체적으로 부드럽게 하였다.  

4) 오벨리스크

그리스도교 초기 영웅 시대의 상징인 오벨리스크(기원전 19-18세기, 길이 25.13미터,  무게 32t, 건축물 총 높이 41.23미터)는 베드로 무덤의 상징이다. 원래 1세기 때의 로마 황제 가이오와 네로의 경기장(네로 통치시에 베드로가 순교(64-65년)한 곳이기도 하다) 가운데에 장식을 위해서 설치되어 있었다. 콘스탄티노 대제가 초기에 기념 대성당을 세우면서 경기장은 모두 없앴으나 탑만은 계속 대 성당 옆에 남아 있었다. 1586년 교황 식스토 5세의 의해 현재의 자리에 위치하게 되었다. 150마리의 말과 47개의 크랭크를 동원했다고 한다. 1817년 여러 시간 동안의 해 높이를 표시하기 위해서 해시계처럼 작동하는 오벨리스크와 함께 4개의 대리석 원형 격자가 자오선을 따라 광장에 설치되었다. 오벨리스크 둘레의 또 다른 대리석 군은 한 송이 꽃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로마에 있는 탑 중에 두 번째로 높은 이 탑 위에 십자가를 올려 놓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승리를 상징하게 되었다.  

5) 분수

대성당을 정면으로 바라보고서 오른쪽의 분수는 카를로 마데르노가 1613년 설계하고 건축하였다. 베르니니는 1675년 다른쪽 부분을 설계하였다. 이 두 분수대 역시 광장의 아름다운 조화와 균형을 위해 세워졌는데, 하느님의 성전에 들어가기 전에 물로써 죄를 깨끗이 씻어야 된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실제로 반세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 곳에 순례왔던 모든 사람들이 이 양쪽 분수대의 물을 손으로 떠서 자신의 머리 위에 뿌린 후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6) 돔(Cupola)

돔은 미켈란젤로에 의해 계획되고 설계되었다. 1590년 지아코모 델라 포르타와 폰타나가 건축하였고, 산타 안젤로 성이나 정원에서 가장 잘 보인다. 율리우스 2세 델라 로베레가 1506년 4월 18일 베로니카 기둥 아래에 초석을 놓았고, 1514년 브라만테가 죽을 당시 창문 사이 벽들(둘레 71미터)과 거대한 연결아치만이 (높이 44.8미터) 완성되었었다. 미켈란젤로가 1546년부터 그가 죽은 1564년까지 돔의 고상부를 건축하였고 1590년에 지아코모 델라 포르타와 도메니코 폰타나가 덮개를 완성하였다. 그 다음 해 그들은 채광창을 만들었다. 내부 모자이크의 밑그림은 16세가 말엽에 바라리에 아피노가 끝냈다. 꼭대기에 하느님과 함께 있는 천국을 묘사하고 있다. 채광창 안에는 이 공사에 지대한 공헌을 한 식스투스 5세에게 바치는 헌사가 기록되어 있다. 돔의 높이는 136.57미터이고 내부 직경은 42.56미터이다.

7) 대성당 정면

카를로 마데르노가 완공했을 때 많은 건축 전문가들에 의해 논란의 시비가 되는 부분이다.  이 거대한 정면 때문에 성 베드로 대성당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돔이 지닌 아름답고 우아한 모습을 다 보여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정면 바로 윗 부분의 중앙에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왼쪽에 세례자 요한을 비롯한 열 한 제자의 대리석상이 있는데. 그 석상들의 높이는 각각 6미터에 달하고 있다.

8) 성 베드로의 문(중앙문)

1445년 콘스탄틴의 바실리카를 위해서 플로렌스의 예술가 아베룰리노가 만들었다. 6개의 큰 패널은 구세주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 성 바오로, 성 베드로와 순교자의 이야기를 묘사하고 있다. 청동문을 기증한 유진 4세 콘둘머가 성 베드로의 발 아래에 묘사되어 있다.

9) 안뜰로 열려져 있는 바실리카의 다섯 개 청동문

a. 성문 : 넓다란 현관으로 들어서면 성당으로 들어가는 문이 다섯이 있다. 맨 오른쪽의 문은 ‘거룩한 문’ 혹은 ‘성년의 문’이라고 하여 25년마다 찾아오는 성년에만 열린다.

b. 중앙문 : 하나를 건너 뛰어서 중앙에 있는 문은 귀중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문이다. 왜냐하면 옛 베드로 성당의 문을 그대로 옮겨 놓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마리아 그리고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를 찬미하는 내용으로 1455년 피렌체 출신 예술가 안토니오 아베룰리노의 작품이다. 맨 위 옥좌에 앉으셔서 강복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겸손한 태도로 존경을 표하는 마리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중세의 연민을 내용으로 한 귀중한 주제이다. 교회는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도 있어야 하는 가족 공동체이다. 중앙에는 로마교회의 두 지주인 베드로와 바오로의 상이 있다. 바오로는 칼을 쥐고 있는데, 이 칼은 그의 순교의 상징일 뿐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상징한다. 베드로는 한 손으로 복음서를 쥐고 있으며 이 문을 만들도록 한 교황 에우제니오 4세에게 열쇠를 주고 있다.

맨 밑에는 네로 황제의 손에 의해 순교를 당하는 두 사도를 표현하고 있다. 같은 패널의 중앙에는 참수형을 집행하기 직전 자비롭게 눈을 가려 준 플라우틸라라는 여인에게 그 천을 돌려주기 위해 구름으로부터 나오는 바오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c. 선악의 문 : 루치아노 밍구치(1977)가 만든 선·악의 문은 1977년 교황 바오로 6세의 80회 생일을 기념해서 그에게 바쳐졌다. 이 문에는 이원론인 선과 악의 주제가 표현되어 있다. 오른쪽에는 선이 표현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① 성 아우구스티노가 한 이단자의 입을 막고 있는 모습 - 진리는 승리하고 이단은 부정되어야 한다. ② 선을 둥지를 틀고 있는 두 마리의 비둘기로 나타냈다. 왜냐하면 오직 사랑만이 모든 것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③ 가장 큰 선은 성체성사의 은총으로 우리를 정화하고 하느님의 아들이게 한다. 선의 결실은 또한 우리로 하여금 지나친 국수주의자가 되거나 인종차별을 금한다. 한 무장하지 않은 병사가 한 흑인 추기경으로부터 영성체를 하고 있다. ④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모든 인류를 커다란 한 가족으로 단합하려 했다.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 교황이 위원회의 위원장인 3명의 추기경과 함께 표현되어 있다.  ⑤ 라자로가 그를 가리고 있던 붕대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처럼, 선을 추구하는 자는 마침내 그를 땅에 묶어 두는 허식으로부터 해방되고, 좋은 친구를 가지게 된다(토비트서).

왼쪽에는 악이 표현되어 있는데, ① 주인과 노예, 그리스도교인들은 신앙을 증오한 이들에게 의해 그리스도와 같은 십자가에 못박히게 된다. ② 악의 상징은 선의 상징인 비둘기를 붙잡는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③ 성 베드로의 동생인 성 안드레아의 순교는 (노예제도의 잔인성을 표현) - 하느님의 모습을 인호로 지닌 인간의 경건함을 더럽히는 악으로부터의 회생을 의미한다. ④ 악한 마음으로부터 살인이 행해진다. 악의 노예인 인간은 정치적 혹은 종교적 이유로 가장 예리한 고통을 가하면서 그의 이웃들을 괴롭힌다. ⑤ 동생인 아벨을 죽이는 카인은 악의 노예와 희생물이다. 한 마리의 독수리가 그의 뇌를 쪼아먹고 있다.

d. 맨 왼쪽에 있는 문은 바바리아 죠지가 기증한 지야코모 만주(1964)의 죽음의 문이다.

과거에는 정의의 문으로 알려졌었다. 왜냐하면 이 문을 통해서 장례행렬이 나갔기 때문이다. 이 문은 성스러운 죽음이 주제이다. ① 그리스도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의 죽음을 아름다운 방법으로 묘사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동안 마리아는 하늘로 올라간다. 이는 마리아의 순결한 몸이 매장됨으로써 썩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다는 생각의 표현이다.  ② 중앙에는 그리스도적 희망의 표시로써 포도나무 줄기와 밀 이삭을 나타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만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는 빵과 포도주를 얻을 수 있다. 이 빵을 먹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③ 착한 아벨의 난폭한 죽음과 의로운 성 요셉의 평화스러운 죽음, 초대 교황 성 베드로의 고통스러운 죽음과 교황 요한 23세의 기도 속에서의 고요한 죽음, 첫 번째 순교자 성 스테파노의 잔인한 죽음과 유폐된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고독한 죽음 ④ 맨 아래에는 6개의 동물의 상이 있는데 죽음의 극적 상황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신앙인에게 항상 깨어있어야 함과 믿음을 불러일으킨다.  ⑤ 내부에는 작가의 손자국 외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나타내는 두 장면이 있다. 손수건 모양으로 된 문을 닫기 위한 손잡이 역시 죽음의 테마를 나타내고 있다. 왜냐하면 죽음이 우리를 찾아왔을 때 흘리는 눈물을 닦는 순간을 생각하게 한다.

이 문들을 영원한 생명의 문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세속과 하느님의 집을 가르는 경계이다.  

10) 피에타

피에타는 미켈란젤로가 카라라(세계적 대리석 채석장, 다비드 상도 이곳의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대리석 한 덩어리로 조각하여 만든 것으로 성모 마리아의 어깨띠에 있는 글귀와 함께 자신의 서명도 기록하였다. 이것은 미켈란젤로의 서명이 들어간 유일한 작품이며, 로마 주재 프랑스 대사인 그로슬레이에 추기경 쟝 드 빌리에의 명으로 만든 것이다. 왜 피에타에만 서명을 했을까? 몇 가지 설이 있는데 그 하나는 롬바르디아인이 피에타를 보고 롬바르디아인의 작품이라고 한데서 격분하여 서명했다는 것, 또 하나는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의 그리스도 얼굴과 피에타의 그리스도 얼굴이 비슷해서 자기의 작품을 명백히 하기 위해서라는 것. 아무튼 다른 사람의 작품이라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까봐 서명한 것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21세의 미켈란젤로가 1498년에서 1500까지 2년에 걸쳐 완성하였다. 미켈란젤로 이전 그리고 그 이후에 많은 예술가들이 운명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팔로 안고 있는 성 모 마리아의 모습을 표현했는데 하나같이 고통으로 인하여 절망에 빠진 마리아의 모습을 나타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가 표현한 성모 마리아의 모습은 초자연적인 색조의 모습을 띄고 있다. 마리아는 당신의 무릎에 피를 흘리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안고 있다. 천상적인 마리아의 모습으로부터 우리는 엄청난 고통을, 조용하면서도 당당하게 받아들이며, 우리를 구원하신 분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나타내고 있는 부드러운 모습을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은 살며시 미소 지으며 조용한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가시관의 고통 위에 부활이라는 장미꽃이 피기 시작하는 것이다 처음 이 조각을 했을 때 미켈란젤로는 마리아의 모습을 너무 젊게 표현했기 때문에 비난을 받았다. 이에 대해 작가는 모든 여인 중에서 간택되신 분의 순결한 얼굴은 결코 시간에 의해 손상될 수 없다고 하면서 의도적으로 젊게 표현했음을 밝힌다. 한편 그가 다섯 살 때 잃은 어머니의 얼굴이 여기엔 기억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어머니의 얼굴은 영원히 젊은 것이다.  

실물 사이즈의 완벽한 균형, 서로의 관계, 젊지만 시간을 초월한 얼굴 모습, 마리아의 차분하면서도 슬픔을 머금은 체념, 미켈란젤로의 고전적인 훈련과 그가 레오나르도의 예술에서 얻은 영감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1972년 손상을 입은 이후 유리관 속에 보관되고 있다.

11) 비오 12세 기념 동상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어렵고 고통스런 시기에 교회를 이끌었던 교황 비오 12세(1939-1958)는 그가 매우 사랑했던 대성당 안에 기억되어 있다. 그의 망연하고 먼 곳을 바라보는 시선은 끝없는 전쟁의 가공할 만한 파괴적 결과가 저 지평선 상에 나타나는 것을 예고하고 있다.  그의 저 유명한 강복하는 손의 모습은 다가오는 재해를 막으려고 노력하는 상징적인 모습이다.

12) 성체 소성당

내부에서 경건하게 쏟아지는 빛, 천사들의 아연한 눈빛, 천장을 수놓은 금색 장식물의 풍부함과 매력, 그리고 선의 조화가 이루어내는 환희는 우리 마음 안에서 끝없이 경이로운 찬미를 이끌어 낸다. 제대 위에 무릎을 꿇고 있는 두 천사는 기쁨으로 충만해 있는 우리를 보면서 기도와 묵상과 찬미로, 그리고 잠시나마 세상의 모든 소음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해준다. 감실은 1675년에 베르니니가 쟈니콜로 언덕에 있는 성당(1500년 브라만테 설계로 사도 베드로가 십자가형을 받았다고 전해지는 장소에 만든 기념성당) 모습을 축소하여 만든 것이다. 제단 위의 성삼위 그림은 대성당에 소장된 모든 그림이 모자이크인데 반해 유일한 유화이다.  

13) 그레고리오의 소성당

‘구원의 성모’라고 불리는 그림이 제대 위쪽에 있다. 미소를 지으시며 위를 죄악에서 구할 당신의 복된 아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신다. 이를 장식하기 위해 여러 가지 천연 대리석이 사용되었다. 제대 밑 돌관 안에는 그리스의 정교회의 교부인 나지안즈의 성 그레고리오의 유해를 1580년 로마에 있는 수도원에서 옮겨와 안치했다.  

14) 성 베드로 상

이 동상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로마시대 작품으로 여겨졌으나, 13세기에 아르놀포 디 캄비오(Arnolfo di Cambio)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당 회중석 끝에 있는 이 동상에는 정교한 선으로 된 후광 장식이 있다. 중세 때에 긴 여행으로 탈진해서 로마에 도착하는 많은 순례자들이 그들이 죽게 될 경우 순례 중에 그들을 거두어 주길, 또한 그의 열쇠를 사용해서 천국의 문을 열어 줄 것을 간구하면서 베드로 상의 발에 친구했다. 1857년 3월 15일, 교황 비오 9세가 특별한 회칙을 통해 이날부터 50일간을 임시 성년으로 반포하며, 이 동상의 발에 입맞춤해야 전대사를 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 후에 순례자들이 사도의 발에 입맞춤을 하는 전통이 이어졌다. 6월 29일에는 이 상에 금실로 수놓은 제의를 입히고, 교황의 삼중관이 씌워지며, 손에는 반지가 끼워지고 그 앞에서 사도에 대한 특별예식을 행한다.  

15) 고백의 제단

수 세기에 걸쳐 성 베드로 무덤에 세 개의 제단이 설치되었다. 1594년 클레멘스 8세가 만든 마지막 제단은 네르바 포럼에서 가져온 대리석 블록재이다. 이 중앙 제대는 교황만이 미사를 집전하는 곳이고, 이 제대에 오르기 위해 마련된 7개의 대리석 계단은 한 개의 커다란 대리석을 깎아 만든 것이다. 이 제대 위에는 올리브와 월계수 가지 모양으로 장식된 베르니니의 거대한 구리 기둥과 천개가 덮혀 있다. 기둥의 아래 부분은 로마인들의 전통적인 무덤 장식인 나선의 홈이 파져있는데, 이는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영혼의 움직임을 상징한다. 내부의 중앙에는 성령의 상징인 후광을 발하는 비둘기가 있다. 맨 위 4개의 모서리에는 꽃관을 쓰고 있는 천사들이 서 있다. 한 편 작은 천사들은 교황의 문장인 삼중관, 열쇠, 그리고 복음서를 들고 있다. 베르니니가 만든 하늘을 향해 춤추며 오르는 기둥은 옛 베드로 성당의 중앙 제대를 장식하고 있던 포도나무 기둥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 위로 대성당의 웅장한 원형 전정이 있으며,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마태16,18)는 말씀이 새겨져 있다. 이 곳의 사도 베드로의 무덤 위의 제대들과 교황 제대 위의 천개, 그리고 대성당의 원형 천정 중심은 항상 일직선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대성당 꼭대기의 십자가와 광장의 탑(오벨리스크)의 십자가는 정동향을 가르키고 있는데, 이는 최후 심판 때에 그리스도께서 동쪽에서 오신다는 초대교회의 신앙을 표현하고 있다.

16) 성 베드로의 무덤

반원형의 참호 모양으로 1600년에 카를로 마데르노가 설계하고 장식하였다. 1979년 아치가 만들어져 바티칸 동굴에서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베드로의 무덤 위에 있는 작은 경당 안에 화려하게 장식된 벽감이 있는데 그 안에 은으로 된 작은 상자가 있다. 그 속에는 빨리움이라고 불리는 6개의 검은 십자가가 수놓아진 작은 흰색의 영대들이 보관되어 있다. 이 영대들은 교황께서 성스러운 부르심의 표시로써 예수 그리스도와 베드로에게 충실하라는 의미로 대주교들에게 걸어주는 것이다. 이 아래의 경당에 성 베드로의 묘가 있으며 묘 앞에 꿇어앉아 있는 동상은 신고전주의 조각가 카노바가 제작한 교황 비오 6세의 동상이다.

17) 회중석

베드로 성당의 회중석은 바오로 5세 보르그헤세의 명에 의해, 1608-12년간에 카를로 마데르노가 만들었다. 돔 안쪽 모자이크에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져 있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 내가 너에게 천국문을 여는 열쇠를 주리라.”

본당 입구에서 제단까지 길이는 186.36미터이다. 성당 장식은 1650년 성년을 기념하기 위해 우르바노 8세 바르베리니 통치 때에 시작한 베르니니가 설계하고 감독하였다.

양쪽에 11개의 작은 경당들이 있다. 길이가 76m인 양쪽 측랑은 미켈란젤로가 만든 거대한 돔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18) 성 베드로의 의자

의자 뒤편에는 구름에 둘러싸인 비둘기 모습을 한 성령의 형상이 태양광선과 천사들의 날개 속에 비치는 것을 볼 수 있다. 비둘기 모양이 새겨진 설화 석고재로 된 반투명 유리의 창문에서 나오는 빛은 성령께서 베드로의 좌를 비추심을 상징한다. 이 거대한 성물은 1658-66년에 베르니니가 설계하고 건축한 것으로, 베드로의 것으로 여겨지는 의자 주위를 감싸고 있다. 양측에 초대교회의 4대 교부인 성 암브로시오, 성 아우구스며노, 성 아타나시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상들이 있다.  

19) 우르바노 8세 기념비(1628-47).

순례자를 중심으로 볼 때, 오른쪽 무덤은 교황 우르바노 8세의 기념 무덤이다. 이 장엄한 교황의 조각상은 베르니니가 교황의 역할을 높이기 위해 만든 것으로, 오른쪽의 칼 든 여인의 석상은 정의를 나타낸다. 그녀는 슬프고 초췌하게 하느님으로부터 위안을 받기 위해 위를 쳐다보고 있다. 상포로 싸여있는 청동으로 된 해골이 있고, 죽음으로 인해 뼈만 남은 손에는 돌아가신 교황의 이름이 써 있는 양피지 말이를 들고 있다. 바르베리니 가문을 상징하는 세 마리의 벌이 그들 군주의 죽음으로써 서로 다른 방향으로 무질서하게 놓여져 있다. 왼쪽의 아기를 들고 있는 여인 석상은 정결과 박애를 나타내며, 돌아가신 교황께서 가리키고 있는 다른 아이를 고통스럽게 바라보고 있다. 이 무덤은 교황자신이 베르니니에게 의뢰했고 완성은 교황 서거 3년후 1647년에 되었다.  

20) 바오로 3세 기념비

바오로 3세는 1545년 트리엔트 공의회를 소집한 교황이다. 그리고 미켈란젤로의 후견인이었으며, 그에게 시스틴 경당에 최후의 심판을 그릴 것을 위임한다. 이 기념비는 포르타의 작품으로 무덤 아래쪽에 조각된 석상 중 오른쪽은 교황의 모친 조반렐라 가에타나의 모습으로 현명함을 상징하며, 왼쪽은 누이였던 줄리아의 모습으로 정의를 상징하고 있다.  

21) 알렉산더 7세의 무덤.

바로크 예술의 위대한 조각가인 베르니니가 그의 나이 80세를 넘긴 노령기에 그의 모든 예술성을 발휘하여 만든 걸작품이다. 교황은 재임 때 대성당과 광장을 마무리 짓기 위해 베르니니를 불러 교황 제대의 청동 기둥과 천개, 성 베드로의 성좌를 제작하였고, 대성당의 내부 장식도 거의 완성하게 하였다. 무덤 위쪽에는 교황이 무릎 끓고 죽음을 준비하며 마지막 기도하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그 곁에는 교황의 삼중관이 놓여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마치 구겨 놓은 종이처럼 정교하게 만들어진 대리석이 있다. 이는 교황의 시신을 덮는 천을 상징한다. 그 안에 해골이 모래 시계를 들고 있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세상에서의 마지막 순간을 뜻한다고 한다. 특히 해골의 머리 부분이 천에 감싸여 보이지 않도록 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죽음이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숙명임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죽음에 대한 한계성을 뜻하고 있다.  또한 그 주위에 네 여인의 석상이 놓여져 있는데 이는 정의, 현명, 자비, 진실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 중 진실을 상징하는 석상은 원래 나체로 조각되었던 것을 교황의 후계자인 인노첸시오 11세가 그 위에 옷을 입혔다고 한다.  

22) 성 그레고리오 대교황 제단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라고 자신을 칭한 교황은 40명의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을 영국에 파견시켜 영국을 복음화했으며, ‘그레고리안 성가’를 수집, 편찬하였고 서방 로마 가톨릭 교회의 4대 교부 중의 한 분으로 추대된다. 제대 위쪽의 모자이크는 교황이 순교자의 피로 얼룩진 천조각을 들어 보임으로써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신앙심을 굳건히 해 주며, 세례성사의 중요성을 보여 주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23) 예수 그리스도 변모 제단

라파엘의 최후 작품인 유화를 본떠서 모자이크로 제작한 것이다(원화는 바티칸 박물관의 미술관에 전시됨) --이 그림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예수와 모세, 그리고 엘리야가 그려진 부분은 환상적인 조용함과 정숙함으로 성서 말씀대로 하느님의 음성을 느낄 수 있도록 표현되어 있고, 중간 부분은 제자들이 놀라는 모습과 경탄하는 모습을 그렸으며, 마지막인 아래 부분은 세상 사람들의 갈등을 표현하고 있다. 사람들의 눈이 하늘을 향하지 않고 있다. 이는 거룩한 교회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고, 세속적인 삶을 추구하던 그 당시 사회상의 한 단면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작가는 무릎 꿇는 여인을 그려넣음으로써 교회를 나타냈고, 죄악에 물든 세상 사람들에게 평화와 신뢰, 그리고 사랑을 주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담으려 했다.  

24) 합창대 경당

대성당 참사원들이 성무일도를 합송하는 곳인데, 이 모든 기도는 노래로 불려지고 있으며, 이곳에 있는 파이프 오르간은 1626년에 설치된 것으로, 유럽전체에서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이다. 중앙 제대 아래에는 동방교부인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344-407)의 무덤이 안치되어 있고 ‘그리스도의 원죄없으신 모친’(무염시태)의 모자이크가 있다.  

25) 세례경당

그리스도의 세례를 그린 ‘마라따’의 원화를 모자이크로 복원시킨 명화가 있다.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그리스도인의 신비를 상기시킨다.  #조금 더 가면 오른편에 영국 스튜어트 왕조의 마지막 3대 국왕 (제임스 3세, 찰스 1세, 헨리 9세)를 새긴 기념비가 있는데 이는 유명한 '카노비'의 작품이다.  

26) 바티칸 정원

독수리 분수 : 아쿠아 파올라 수로의 물이 바티칸에 도달하게 됨을 기념해서 만든 분수다. 독수리는 보르게제 가문의 문장이다.

라디오 바티칸이 방송되는 탑 : 이 탑은 847년에 세워진 레오니네 벽의 일부이다.

27) 바티칸 박물관

1377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가 아비뇽유폐에서 풀려난 이래 현재까지 교황의 주거지가 되어 있는 바티칸 궁전은 1400여 개의 방과 성당 가운데서 교황이 사용하는 곳은 얼마 안되며 대부분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관람할 곳은 1층과 2층으로 나누어져 있다. 1층에는 회화관, 비오 클레멘티노 미술관, 이집트 박물관, 도서관, 키아라 몬티 박물관, 시스티나 경당 등이 있고 2층에는 에트루리아 미술관, 지도 갤러리, 라파엘로의 방, 라파엘로의 복도가 있다.

관람 방법은 다음 페이지 참조.

28) Castel Sant´Angelo

테베레 강을 따라서 세워진 원형의 성채로 지름이 64m다. 139년에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자신과 후계자들의 묘소로 삼기 위해 완성되었는데 유사시에는 교황의 피난처로 사용되었고 감옥으로도 이용되었다. 교황청까지는 성벽 내부의 좁은 길을 통해 외부의 접촉없이 왕래할 수 있다고 한다. 유명한 오페라 ‘토스카’의 최후 장면으로도 유명하다. 산타 안젤로 라는 이름은 590년 로마에 페스트가 유행했을 때, 기도를 올리자 마침내 하늘에서 미카엘 천사가 이 성 위에 내려오면서 페스트가 종식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성 위에는 미카엘 천사의 상이 있다. 천사 상은 바로크의 천재 베르니니의 작품이다. 내부에는 각종 병기가 전시되어 있다.

성 앞에 있는 다리 위에 서 있는 조각상들은 베르니니 작품이다.

10. 로마의 근교 도시

1) Tivoli

지하철 B선 종점 Rebibbia역에서 티볼리 행 버스. 15분마다 출발.

시인 카툴루스와 호레이스, 시저의 암살자 부루투스와 카시우스, 황제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 등이 여기엣 살았다. 맑은 공기와 수려한 경치가 티볼리의 매력이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이곳에 와서 불면증을 고쳤다고 한다. 로마인들의 호화로운 생활양식은 르네상스 시대에 재현되는데, 에스테 빌라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2) Villa Adriano

아드리아누스 황제가 로마 제국을 여행하면서 마음에 드는 건물과 경관을 재현해 놓았던 곳이다. 그리스의 아테네를 본뜬 정원 페킬레, 이집트의 세라피스 신전과 그 문 앞을 재현해 놓은 카노포(수로)가 볼만하다. 아드리안 별장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 중 하나는 ‘해상 극장’이다. 이곳은 원형의 풀(pool)로, 중앙에 섬이 있고 섬은 기둥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섬은 아마도 아드리아누스 황제가 정치의 시름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며 취미생활을 즐겼던 개인 스튜디오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출토된 것들은 병설박물관과 로마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지하철 B선 종점 Rebibbia역에서 빌라 아드리아나 행 버스. 하루 16대

3) 프라스카티

지하철 A선 종점 Anania 역에서 프라스카티 행 버스. 15-20분마다 출발. 기차 떼리미니에서 하루 17회, 약 20분 소요.

4) 카스텔간돌포

지하철 A선 종점 Anania 역에 있는 Cotral 매표소에서 카스텔 간돌포행 버스표 구입 £2,000. 3번 출구에서 출발. 8:40  11:15  12:30  14:45  15:15  계절에 따라 시간표가 다름.

기차 떼리미니에서 Albano 행 약 44분 소요. 10:00  12:06

5) 젠차노

지하철 A선 종점 Anagnia 역에서 Velletri 행 버스로 종점에서 1정거장 전에 하차. 약 25-30분 소요.

참고 :

로마의 영화관

Pasquino 영어로 상영   Via Vicolo del Piede 19 T. 5803622


1). 알바(Alba)의 왕이 그의 어린 조카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티베레 강에 버렸으나, 강가로 떠내려온 이들을 암늑대가 키웠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트로이 전쟁의 영웅인 에네아스(Aeneas)가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할아버지였다고 한다.

2) 베드로 성당에 대해서 잘 설명하고 있는 책 중에 엠마누엘 클라리치오의 「성 베드로는 말한다」가 그래도 가장 잘 된 것같다. 베드로 성당 앞에 있는 앙코나 서점에서 구입할 수 있다. 책이 없는 경우 주문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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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edited on 01/29/2010 08:20 by 프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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